방죽은 방축을 가리키는 말이다. 방죽은 일반적으로 인공적으로 만든 저수지를 가리키는 말이나 홍수 등을 대비하는 긴 둑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 주위에 있는 저수 시설들에 붙어 있는 이름들을 참고해 보면 어떤 규정에 의한 구분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연못보다는 크고 저수지보다는 작은 규모의 저수시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방축(防築)의 글자를 풀이해보면 쌓아서 막았다는 뜻이니 어느 특정한 지역을 가로질러 막은 것이 되고 수리시설에 관계된 용어이니 물을 가두기 위해 막은 게 분명하다. 따라서 둑이라는 뜻과 더불어 저수지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방죽을 가리켜 '물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쌓은 둑' 또는 '파거나 둑으로 둘러막은 못' 으로 설명되어 있고 강원, 전북, 충청지방에서는 웅덩이의 방언이라고 나와 있다. 또 방죽과 관련된 속담을 찾아보면 '방죽을 파야 개구리가 뛰어들지' 나 '큰 방죽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다' 등을 찾아볼 수 있다. 또 방죽이라는 말은 저수지를 옛날부터 시골에서 주로 부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방죽은 홍수 등에 대비해서 마을이나 농경지를 보호하기위한 긴 둑을 의미하거나 농업용수를 가뒤두는 수리시설을 카리키는 말임이 분명해 진다.
우리나라는 농업이 중심을 이루는 국가였고 과거에도 물을 다스리는 치수(治水)는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의 하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제언사(堤堰司)라고 하는 관청을 따로 두고 농업용수를 관리하였는데 현재남아 있는 각종 『읍지』들을 보면 제언에 관한 기록이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방죽이 있던 곳에 부근에 마을이 생길 경우 자연히 방죽과 관계되는 마을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방죽이라는 말 뒤에 '-말', '-골', '-뜸', '-거리', '-안' 등등의 말이 붙어서 마을을 나타내는 이름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죽과 관련된 지명이 남한에만 450여 군데나 있다고 한다.
용인에서 방축이 들어간 지명으로는 처인구 유방동의 방축동과 남사면 방아리의 방축동이 있고 수지구 풍덕천동에도 방축동이 있다. 이 밖에도 속지명에서 까지 방축이 들어간 이름을 찾는다면 훨씬 많은 지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명유래에 전하는 유래를 보면 유방동 방축동의 경우 '방추꼴, 또는 '방추꿀"이라고 부르는데 마을의 동쪽에 경안천이 흐르는데 장마 때가 되면 제방이 유실되어 이를 복구한 뒤 하천의 범람을 막았다고 하여 방축동이라고 했다고 한다. 남사면 방아리 방축동의 경우도 '방축꼴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방동의 경우와 같고 제방을 쌓아 장마를 다스렸다고 하는 유래 또한 비슷하다.
그러나 수지구 풍덕천동의 방축골의 경우는 병자호란중에 방진(方陣)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방축(方築)을 쌓았던 곳이라고 하여 방축동이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위의 세 경우가운데 남사면과 유방동의 방축골은 농업에 이용하기위한 수리시설이나 제방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명이 마을이 자리한 지형이나 형국(形局)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풍덕천동에 있는 방축동의 경우는 뒤에 덧붙여진 풀이로 생각된다. 이는 다른 두 지역처럼 '방축골'이라고 하는 속지명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며, 진(陣)터가 있는 경우는 오히려 처인구 고림동의 이진말(古陣)이나 보정동의 이현(泥峴)마을처럼 이름이 붙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또 대규모 농경지나 마을을 보호하기위하여 쌓은 둑(堤堰)이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지는 것을 감안한다면 방축(防築)이라는 마을의 이름이 둑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물을 가둔 방죽(저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유방동 방축마을의 경우 1900년대 초반의 구한국시대의 지명지에 안방죽골(內防築谷)이 나오는데 이는 마을이름이 현재 경안천가에 쌓은 방축(防築)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농업용수를 가둬두던 방죽에서 유래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하나의 예가 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