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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

진가 2009. 4. 15. 21:46

예송논쟁

예송(禮訟)은 예절에 관한 논란으로, 조선 후기에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 효종 승하 시와 1674년 효종비(妃) 인선왕후의 승하 시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제가 쟁점이 되었기 때문에 복상문제(服喪問題)라고도 부른다.

서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설과 9개월설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설과 1년설을 각각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배경

인조 이래 서인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있던 남인은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1659년(효종 10년) 효종이 돌아가자 효종의 계모후(繼母后) 자의대비의 복상은 서인의 뜻을 따라 기년(朞年 : 만 1년)으로 정하고, 곧 이어서 현종이 즉위하였다.

 제1차 예송

그런데 이듬해인 1660년(현종 1년) 음력 3월 남인 허목(許穆) 등이 상소하여 조대비의 복상에 대해 3년설을 주장하면서 들고 일어나 맹렬히 서인을 공격하여 잠잠하던 정계에 풍파를 일으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 송시열 등은, 효종은 인조의 제2왕자이므로 계모후(繼母后)인 자의대비의 복상에 대해서는 기년설(朞年說 : 만 1년)이 옳다고 대항하였고, 남인 윤휴 등은 또다시 이를 반박하여 효종은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적장자(嫡長子)나 다름없으니 3년설이 옳은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끝내 초지를 굽히지 않아, 결국 기년설이 그대로 채택되고 서인은 더욱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제2차 예송

그 후 1674년(현종 15년) 효종의 비(妃)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 인선왕후)가 돌아가자,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를 에워싸고 또다시 서인·남인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서인은 대공설(大功說 : 자의대비)의 복상을 서인의 주장대로 기년(朞年)으로 정해 놓았는데, 이제 와서 서인의 주장대로 대공(大功)으로 고친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부당한 일이라고 들고 일어나며, 전번에 정한 대로 기년(朞年)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이번에는 남인이 주장하는 기년설이 채용되어 남인이 다시 득세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갑인예송(甲寅禮訟)이다.

 

 

* 부가 설명 : 이 문제가 왜 중요하냐하면 효종을 종통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는 다음 왕위 계승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인데 인조의 장남이자 효종의 형이었던 소현 세자의 아들이 살아있을 경우 효종을 종통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정상적으로하면 효종의 아들이 다음왕되어야 하는게 아니라 소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수 있는 문제이다.(이때는 소현 세자의 아들들은 모두 죽고 없었음)  효종의 아들 현종은 아버지가 돌아갔을때는 자기가 힘이 없었으므로 서인의 주장에 밀렸지만 어머니가 돌아갔을때는 이미 왕이된지 오래된이후이므로 서인들의 주장을 물리칠수 있었다. (자신의 정통성과 관련이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