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정치
인조 시기에 들어서면서 붕당정치는 성숙의 단계를 맞이하게 됩니다. 서인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남인들의 정계진출을 허용함으로서 비판세력과 함께 공존하는 이상적인 붕당정치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이른바 ‘산림山林’ 이라 일컬어지는, 즉, 재야에 물러나 있으면서도 정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유학자들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됩니다.
조선 후기 서인-노론들의 대표적인 산림이였던 우암 尤庵 송시열宋時烈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만 3000여회 이상 이름이 언급될 만큼 당쟁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죠.
이와 같은 공존의 정치가 점차 깨지게 되는 것은 현종顯宗 시기에 들어서면서부터입니다. 이는 현종 시기에 남인 계열이 왕권을 강화시키고자하는 왕의 지원을 받아 더 이상 서인의 비판세력에 머물지 않고 정국의 주도세력으로 나아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인과의 충돌은 필연적인 것이었고요, 그 충돌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송禮訟 논쟁입니다. 효종의 붕어崩御와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의 죽음 때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의 상복 착의 기간을 놓고 대립한 이 예송논쟁은 인조 시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송시열과 예송논쟁에서 크게 대립했던 남인 계열의 두 사람,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미수眉叟 허목許穆,
두 사람 모두 <<어부사시사>>와 '척추동해비'라는 유명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의 논리 중 하나는 ‘숭명대의崇明大義’였습니다. 광해군을 아시다시피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명의 구원병 요청에도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명에 구원군으로 파견되었던 강홍립이죠. 강홍립은 명과 후금과의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기회를 보다가 아예 후금에게 항복을 합니다. 이와 같은 중립적인 외교 정책에 반기를 들도 광해군을 몰아낸 것이 서인이었기 때문에 서인은 집권하자마자 반후금, 반청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에 후금을 명을 치기에 앞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인조 5년인 1627년에 조선을 침입하여 형제의 관계를 맺는 정묘약조를 체결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이죠. 이 호란으로 인해 조선은 후금에 막대한 세폐를 지불하게 되었고, 결국 이는 후금에 대한 반감을 더 크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이 상황에서 후금의 사신이 조선에 문상 차 왔다가 군신의 관계를 요구하게 되면서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이 더욱 고조되었고, 결국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합니다.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조선의 굴욕적인 항복으로 끝을 맺게 되죠. 그리고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에 볼모로 끌려가게 됩니다.
소현세자가 볼모생활을 할 당시 북경에 머무르고 있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
소현세자는 아담 샬과의 만남은 '하늘이 이어준 만남'이라 하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에 머무는 기간동안 명의 멸망과 청의 흥기 과정을 생생히 목격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볼모의 기간동안 두 왕자가 느낀 것이 굉장히 상반된 것이었습니다. 소현세자는 대륙의 대세가 청으로 넘어왔음을 깨닫고 청에 무조건 반대,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쓸만한 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특히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인 아담 샬을 만나서 각종 천체 관측 기구와 서양의 발명품을 접하게 되고 조선에 귀환하면서 이를 다 갖고 들어옵니다. 또한 천주교에 대해서도 접하고 조선에 천주교를 전파하고자 신부를 파견해달라는 요청까지 하여 아담 샬을 놀라게 만듭니다.(당시 중국에도 신부가 부족해 결국 신부는 파견되지 않고 천주교를 믿는 청의 환관과 후궁들이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인조는 이러한 소현세자의 태도에 대해 크게 의심을 품었습니다. 인조는 청나라가 언제 자신을 내치고 세자를 옹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도 사로잡혀 있었죠. 실제 청은 세자가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자 왕이 입는 대홍망룡의를 주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물론 소현세자는 깜짝 놀라며 이를 거절했지만 이는 인조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일이었죠. 특히나 세자가 청에 머물면서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보여 청의 호감을 샀던 것과 이에 따른 청나라 대신들의 후한 평가도 인조의 의심을 더욱 가중시키는데 한 몫 했습니다. 인조는 세자가 무려 9년 만에 돌아오는 데도 불구하고 대신들의 진하進賀를 막는 편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시아버지 인조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맞게 된 세자빈 강씨의 묘인 영회원
결국 세자는 조선에 돌아온 지 불과 넉 달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습니다. <<인조실록>>에 조차 염습하기 전 세자의 시신 온통 검은 빛이었고 그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고 기록되어있는 것을 보면 독살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세자를 치료했던 의원인 이형익은 인조의 비호를 받으며 국문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조선 최고의 명의라는 허준조차 선조의 죽음으로 인해 귀양을 가야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이러한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죠. 인조가 세자를 죽였을 지도 모른다는 것은 세자 사후에 인조의 행적에서 드러납니다. 세자가 죽게 되었을 때 본래 그 세자에게 원자가 있다면 그 원자를 세손으로 삼아 그 위를 잇게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영조-사도세자-정조의 경우이죠. 소현세자의 아들도 그 당시 살아있었습니다만,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이 어리고 나라를 맡은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원손인 봉림대군에게 세자를 자리를 맡깁니다. 이에 대해서 사대부들의 반대는 엄청났습니다만 인조는 이런 것을 다 무시하고 거의 억지로 봉림대군을 세자의 자리에 앉힙니다. 그리고 소현세자빈 강씨에게는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그 가문을 거의 풍비박산을 내고 결국 강씨는 폐서인시켜 궁에서 내쫓은 다음, 사사시켜버립니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 역시 각각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 이 중 두 아들은 죽고 막내아들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 즉 소현세자의 원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봉림대군을 세자의 자리에 앉힌 것이 이후 예송논쟁의 씨앗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