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성곽

진가 2009. 8. 9. 18:10
             

                                                           - 성곽의 배치 -


          
    

                                                            - 성문 배치 -

 

                                                 

                                   
                                                                  -  돈의문 -

                                                    

 

     

 

                                                           - 여장 배치 -


                         
                          
                                                       - 서울 성곽(자하문) -

                             

 

 한국의 성

 

한국 사적(史蹟)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성 또는 성지(城址)이다. 이처럼 많은 성이 언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지 그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BC 194년에 위만(衛滿)이 왕검성(王儉城)에 도읍을 정하고 위만조선을 건국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BC 18년에는 백제의 온조왕(溫祚王)이 위례성(慰禮城)에서 즉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성은 오래 전부터 한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그 성이 어떠한 형태의 성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백제 초기에 축성된 풍납토성(風納土城:서울 강동구 풍납동)과 132년(개루왕 5)에 축성된 북한산성은 지금도 사적으로 남아 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 후 삼국시대를 통하여 나라마다 많은 성을 축조하였고, 그 중에서 신라의 삼년산성(三年山城)과 월성(月城)은 유명하다.

한국의 축성술은 이 무렵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한국의 지형과 환경에 적응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한국의 성을 종류에 따라 구분하면 도성 ·읍성 ·산성 ·행성(行城:長城) 기타로 나눌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산성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점이 일본에 거성이 많은 점과 매우 대조적이다.

① 도성:도성은 수도의 방어를 위하여 구축한 성곽으로 삼국시대 백제의 부여와 고구려의 평양에는 외곽을 두른 나성(羅城)의 일부가 잔존하고 있어 도성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도성을 축조하지 않고, 대신 월성을 비롯하여 경주를 둘러싼 산 위에 남산산성 ·선도산성(仙桃山城) ·명활산성(明活山城) 등을 배치하여 국토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한편 고려와 조선 시대의 도성은 국도의 시가지를 둘러싼 주위의 산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하였다. 개성의 성벽은 토축(土築)이었으며, 서울의 성곽도 처음에는 토축한 부분이 많았으나 뒤에 모두 석성(石城)으로 견고하게 개축하였다. 또한 조선 정조 때 축조한 둘레 약 5㎞의 석축으로 된 수원성(水原城)은 그 규모와 형식에 있어 서울성에 버금가는 한국의 대표적인 도성이다.

② 읍성:지방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읍성 역시 그 시작된 시기를 밝히기 어려우나 산이 많아 일찍부터 산성이 발달한 한국에서는 일단 유사시에는 시가지를 버리고 산성으로 피난하는 방법이 오랫동안 계속된 것 같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때 지방 소경(小京)을 비롯하여 주 ·군 ·현에 성을 축조한 기록이 있으나, 그것이 평지에 축조된 읍성인지, 아니면 전란(戰亂) 때 고을의 주민을 수용할 수 있는 산성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북방의 영토확장에 많은 힘을 기울여 대동강 이북의 국경지대에 여기저기 주진(州鎭)을 설치하여 성을 쌓고, 거기에 남쪽으로부터 장정(壯丁)과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여 변경의 방위태세를 갖추었다. 이들 주진성은 후에 변방 읍성으로 되었으며 그 형식은 대개 평산성(平山城:또는 半山城)이었다. 한국의 촌읍은 대개 배후에 주산(主山)을 두고 그 기슭에 형성되어 있으므로 성곽도 자연적으로 읍의 주위를 두른 다음 그 끝이 산으로 이어지는 평산성 형식이 발달하였다.

한편 동해안을 비롯한 각 해안에도 왜구(倭寇)와 여진(女眞)의 해적을 막기 위한 주진성이 점차 증설되었으며, 이에 따라 내륙지방에도 많은 읍성이 축조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평산성이 아닌 순수한 평성으로 된 읍성은 조선 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예로 경주읍성과 경남의 언양읍성(彦陽邑城)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중국 성곽을 본떠 그 형태가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성벽은 석축으로 구축되었다. 그 밖의 읍성들도 조선시대의 것은 모두 석축으로 축조되었고, 먼저 토축이었던 것도 대부분 석축으로 개축되었다.

③ 산성:산성은 한국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형식은 입지조건과 지형선택의 기준에 따라 테뫼식(또는 머리띠식)과 포곡식(包谷式)으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이다. 전자는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성벽을 두른 모습이 마치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며, 대개 규모가 작은 산성에 채택되었다.

한편 평야에 가까운 구릉(丘陵) 위에 축성한 것도 있으며 경주 월성 ·대구 달성(達城) 등은 평지에 있는 독립구릉(獨立丘陵)을 이용한 특이한 예이다. 산성의 둘레는 400∼600m 가량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800m가 넘는 큰 것도 있으며 성벽은 토축으로 한 것이 많고, 때로는 그것을 2중 3중으로 둘러 구축한 것도 있다. 한편 포곡식은 성 내부에 넓은 계곡을 포용(包容)한 산성으로, 계곡을 둘러싼 주위의 산릉(山陵)에 따라 성벽을 축조한 것이다.

성내의 계류(溪流)는 평지 가까운 곳에 마련된 수구(水口)를 통하여 외부로 유출되며 성문도 대개 이러한 수구 부근에 설치되어 있다. 성벽은 대개 견고한 석벽으로 축조되었으나 백제의 부소산성(扶蘇山城)은 토축이다. 이 성은 둘레가 2,000 m 내외이나 조선시대의 포곡산성은 5,000∼6,000 m 내지 1만m가 넘는 대형산성도 적지 않다. 이들은 가공석재를 사용한 완전한 석축성벽과 무사석(武砂石)으로 구축된 성문, 그리고 총안(銃眼)이 있는 여장(女墻)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현존하는 이들 산성으로는 임진왜란 때의 행주산성(幸州山城), 병자호란 때의 백마산성(白馬山城) ·남한산성 등을 비롯하여 부여의 성흥산성(聖興山城) ·부소산성(扶蘇山城) ·청마산성(靑馬山城) ·청산성(靑山城) ·석성산성(石城山城) ·건지산성(乾芝山城), 공주 공산성(公山城), 경주 남산성 ·부산성(富山城) ·명활산성, 주산산성(主山山城), 물금증산성(勿禁甑山城), 화왕산성(火旺山城) ·목마산성(牧馬山城), 김해 분산성(盆山城), 함안 성산산성(城山山城), 성주 성산성(星山城), 양산 신기리산성(新基里山城) ·북부동산성(北部洞山城) 등을 들 수 있다.

④ 행성(장성):631년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때 동북의 부여성으로부터 남쪽 랴오둥[遼東] 지방에 이르는 해안선 1,000여 리에 장성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백제에서도 진사왕(辰斯王) 때 청목령(靑木嶺) 이서에 관방(關防)을 설치하였고, 신라 성덕왕(聖德王)은 721년에 발해(渤海)와의 국경지대에 북경장성(北境長城)을 설치하였으며, 헌덕왕(憲德王)은 826년 패강장성(浿江長城) 300여 리를 축조한 바 있으나 현존하지 않으며 현재 유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신라가 왜적을 막기 위하여 축조한 관문성(關門城:경주군)이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거란(契丹)과 여진(女眞)에 대한 대비책으로 압록강구에서 동해안 정평(定平)에 이르기까지 천리장성을 축조한 사실은 유명하다. 이 장성은 압록강과 청천강(淸川江)의 분수령(分水嶺)을 이용하여 산정을 이용한 부분은 토축에 의거하고, 평지는 석축으로 되어 있는데 정평 부근에서 조사한 토축장성은 내황(內隍)과 외황(外隍)시설을 갖추고 있음이 밝혀졌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4군 6진의 설치로 확정된 국토의 경계를 방어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 소규모의 행성들이 축조되었다. 이들은 천연의 지형을 이용하여 적이 침입하기 쉬운 영로(嶺路)를 차단할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 많다. 이러한 행성은 병자호란 이후에도 다시 논의되어 영조 때 압록강에 연한 영토에 많은 행성이 시설된 일이 있었다.

⑤ 기타의 성:서울 동쪽 한강변에 있는 백제시대의 풍납토성은 평지에 축조된 토성이며, 임진강의 적성면(積城面)에 있는 육계토성(六溪土城)도 이와 비슷한 토성인데 그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 특수한 것으로는 임진왜란 때 경남 연해지방에 주둔한 왜군들에 의하여 축조되어 몇 개소에 남아 있는 일본식 성곽을 들 수 있다.

 

 

궁성(宮城)




궁성은 평상시 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에워싸고 있는 성벽이나 담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궁궐, 궁전, 궁실이 혼용되어 불리고 있으며, 이들 용어는 넓은 의미로 볼 때 같은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궁궐이란 용어는 궁과 궐의 합성어로서 궁(宮)이란 천자나 제왕, 왕족들이 살던 규모가 큰 건물을 일컫고, 궐(闕)은 본래 궁의 출입문 좌우에 설치하였던 망루를 지칭한 것으로, 제왕이 살고 있던 건축물이 병존하고 있어서 ‘궁궐(宮闕)’이라 일컫게 되었다.

궁성은 도성(都城)이 축조되지 않은 곳에도 있을 수 있어 반드시 도성 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궁성은 기능별로 정사(政事)를 위한 정무건축공간과 일상생활을 위한 생활건축공간, 그리고 휴식과 정서를 위한 정원건축공간으로 구획하고 있다. 배치형식은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정사를 목적으로 한 건축군을 앞에 배치시키고, 일상생활건축군을 뒤편에 배치하는 방법인 전조후침(前朝後寢)의 배치형식이 통례로 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배치법은 중국이나 일본의 궁궐배치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고구려 궁성(高句麗 宮城)은 국내성(國內城)과 안학궁성(安鶴宮城)으로, 배치형식이 밝혀진 것은 안학궁성이다. 안학궁성 내에는 총건평 31,458㎡에 달하는 궁전터들이 있으며, 남북 중심축을 따라 외전, 내전, 침전이 차례로 놓이고 그 양 옆에는 나란히 대칭되게 동·서외전과 동·서내전이 배치되어 있었고, 침전 좌우에는 창고와 기타 보조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동북모서리에는 동궁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남쪽에는 길게 궁중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안학궁의 전체 평면계획에는 대각선 전개비(展開比)를 널리 도입하였으며 정삼각형의 정점에 주요 대상을 배치하는 등 여러 가지 배치수법들이 적용되었다. 대개 궁전의 기본 건물들은 중심축상에, 다른 건물들은 그에 대칭되게 배치하여 위엄을 나타내게 설계하였으며 모두 회랑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또한 침전 뒤편 북쪽에는 인공의 조산을 만들어 후원(後苑)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궁성(百濟 宮城)은 웅진도성(熊津都城) 내에서 임류각지(臨流閣址), 추정왕궁지(推定王宮址), 지당지(池塘址), 목곽고(木槨庫) 등 왕궁유적이 확인되고 있으며, 사비시대의 왕궁유적은 부소산성(扶蘇山城) 남록에서 궁성의 최북단에 축조된 석축시설(石築施設)과 함께 ‘북사(北舍)’가 새겨진 항아리편이 출토된 건물지(建物址)와 후원(後苑)시설로 추정되는 방형연못(方形蓮池)이 확인되었다.

신라 궁성(新羅 宮城)은 문헌에 의하면 금성(金城)과 만월성(滿月城)이 나타나고 있으나 그 유지를 확인하기 힘든 상태이며, 월성(月城)이 궁성의 역할을 하였는데 성의 형태가 흡사 초생달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신월성(新月城)’이라 불렀으며, 왕이 거처하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월성의 둘레는 1,841m이며, 성내 면적은 55,000여 평에 달하며, 9개소의 문지가 남아 있다. 성내에서 현존하는 유구는 아직 상세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문무왕 때부터는 월성의 범위가 훨씬 넓게 확대된 것 같으며, 강무전(講武殿), 좌사록관(左司祿館), 동궁(東宮), 고문(庫門), 귀정문(歸正門) 등 많은 전각과 궁문 등이 이 때를 전후하여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신라 궁성(宮城)의 범위를 첨성대(瞻星臺) 부근과 월성의 남동쪽 국립경주박물관 자리까지를 포함하여야 한다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발해 궁성(渤海 宮城)은 남-북으로 놓인 장방형으로 전체 둘레는 2,680m이며, 동서성벽의 길이는 720m, 남북성벽의 길이는 620m이다. 궁성 내에 궁전터와 우물터 등의 유지가 남아있다. 궁전터는 7개소가 확인되고 있는데, ‘오중전(五重殿)’이라 불리우는 5개소의 궁전은 궁성 남문과 북문을 잇는 중심축선상에 놓여 있으며, 그 규모도 매우 웅장하다. 그 중 제1궁전터와 제2궁전터가 가장 웅장한데 제1궁전터는 길이(동-서), 너비(남-북), 높이가 56×25×3m이며, 제2궁전터는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길이, 너비가 82×28m에 달한다. 제4궁전터는 중심에 있는 본채와 그 좌우에 있는 곁채의 3개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21.6×15m로 밖으로는 회랑을 두르고, 안에는 동서로 이어지는 3개의 방이 있다. 좌우 곁채의 규모는 같으며, 27×15m의 9칸짜리 건물이다. 본채와 마찬가지로 동서로 이어지는 3개의 방으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온돌장치를 하였으며, 구들의 골은 2개이고, 높이는 0.33m이다. 또한 제2궁전터의 동쪽과 서쪽에서 2개소의 우물터가 확인되었는데, 횡단면이 8각형을 이루고 있는 8각정(8角井)으로 그 입구의 직경은 약 0.66m이며, 현존 깊이는 5.6m이다.

고려시대 궁성(高麗時代 宮城)은 개경에 정궁, 이궁, 별궁이 건설되었고, 서경이 중시되어 대화궁이 건설되었으며, 몽고의 침입 시에는 고종 19년(1232) 초에 강도(江都:강화도)에 궁궐을 건설하여 도읍을 옮겼으며 1270년까지 정궁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였다.

개경의 궁성 정문은 도시의 기본 간선축과 일치하지 않고 주요 간선가로와 직각으로 꺾여지는 도로의 축상에 배치되었다. 궁궐의 중심이 되는 외전·내전·침전 등의 건물군도 남북의 동일 중심축에 배치되지 않았다. 만월대의 궁궐 특징은 평지가 아닌 구릉지대에 건물을 배치한 점이며, 정전까지는 기하학적으로 구성하면서 주변 건물들은 비교적 경사지에 자연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배치하였다. 그리고 고려 초부터 유행된 지리도참설에 따라 건물의 규모는 작았으나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궁중원림이 크게 발전하였다. 인공으로 물을 끌어들여 못을 만들고 시냇물과 폭포를 만들었으며, 누정을 짓고 가산을 만들었으며, 대를 쌓고 기묘한 송죽과 화초를 심어 원림을 조성하였다.

조선시대 궁성(朝鮮時代 宮城)으로 대표적인 것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등이다. 경복궁은 이들 중 정궁(正宮)으로서 주위에 궁장을 쌓아 전체 평면이 남-북을 장축으로 하는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남 중앙에 광화문(光化門)을 설치하고, 동쪽에는 건춘문(建春文),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 북쪽에는 신무문(神武門)을 배치하였다. 광화문에서 근정전과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까지의 중요 건물이 남북 중심축상에 배치되고 좌우 일곽들이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경복궁의 후원은 궁역 서쪽의 경회루지역과 궁역 북쪽의 향원정지역으로 나누어 조영하였다.

창덕궁(昌德宮)은 태종 5년에 창건되었으며,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일명 동궐(東闕)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광해군 3년에 중건하였으며, 정전(正殿)인 인정전(仁政殿)이 순조 3년에 재차 화재를 입어 그 이듬해(1804)에 중건된 것이 현재 남아 있다.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대조적으로 자연적인 지형과 산세에 따라 전각을 배치하고 자연과 인공의 융합을 무리 없이 조화시킨 점에 그 특징이 있다. 후원(後苑)인 비원은 누각과 정사들이 자연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조선시대 궁궐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꼽히고 있다.

창경궁(昌慶宮)은 1483년 고려 수강궁지(壽康宮址)에 세운 궁궐로 창덕궁 동측에 위치하며, 임진왜란 때 전소한 것을 1616년 다시 중건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경궁은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일곽이 궁궐배치의 기본형식인 남향배치가 아닌 동향이고, 중심축인 동서축보다 남북축이 더욱 길어 특징적이다. 그러나 그 밖의 건물들은 이 주축과는 관계없는 비대칭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밝고 높은 언덕인 통명전 언덕과 북쪽의 환취정을 중심으로 후원이 형성되어 있다.

덕수궁(德壽宮)은 처음부터 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고 왕족의 사저로 쓰이던 것을 궁으로 개조한 것이다. 이 궁이 본격적으로 궁의 모습을 갖춘 것은 고종이 궁궐로 사용하면서부터이다. 덕수궁의 배치를 보면 남북 중심축 상에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을 비롯하여 석어당, 즉조당, 대한문 등이 있는데, 다른 궁궐에 비하여 궁장을 두른 기지나 내전의 여러 전각배치가 산만한 감이 있다. 이는 덕수궁이 원래 민가 가옥이었던 것을 궁궐로 용도를 변경시킨 이유와 임진왜란의 피난에서 환도하여 일시 궁궐로서 거처하였던 탓이라 생각된다.

이를 볼 때, 한국 궁성의 공간 배치와 건물형태는 발해의 예를 제외하고는 중국에서의 인위적인 공간 구성과는 다르게 자연 지형에 순응하면서 조화를 이룬 독창성이 발휘된 것이라 하겠다.

 

도성(都城)




도성(都城)은 왕이 평상시 거주하는 궁성과 관부 및 그 주위를 에워싼 성곽(城郭)으로, 군사적인 목적 외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었다.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유통경제의 발전은 인구의 집중화 현상을 수반하였고 이에 따라 도시가 형성 되었는데, 이 도시에 성벽을 둘러싼 것을 ‘읍(邑)’이라 하였다. 이 읍은 곧 행정체제(行政體制)를 갖추어 원초적인 ‘국(國)’을 형성하였으니 읍과 국을 막론하고 성벽으로 둘러 쌓인 도시란 점에서는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러한 발전 단계에서 큰 읍을 구분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있는 것을 ‘도(都)’라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읍으로 칭하게 되었다.

‘國’이란 자를 살펴보면 ‘口’를 ‘戈’로 지키고 ‘口’와 그 주위를 곽(郭)으로 에워싸고 있는 모습의 상형(象形)으로서, 중국의 경우 국의 등장은 곧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을 구비한 성곽을 수반한 도성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도성들은 왕이 머무르고 있는 궁전(宮殿)을 둘러싸고 있는 ‘궁성(宮城)’과 관부가 밀집되어 있는 ‘내성(皇城)’과 병사, 농민, 수공업자 등의 집락이 있는 외부 공간을 둘러친 ‘외곽(外郭)’으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의 성곽도시형태였다.

중국의 도성은 기본적으로 정전(井田)계획의 모형에 따라서 구성되었으며, 궁성을 주체로 중심구를 확립하고 대칭적으로 앞에는 조정(朝廷), 뒤에는 시장(市場), 좌측에는 조(祖)를, 우측에는 사(社)를 안배하였다. 그리고 궁성의 남북 주축선을 도성 계획의 주축선으로 하고, 이를 중심으로 도로망을 채용하였는데 구경구위(九經九緯)로 조성된 3개의 큰길을 주간(主干)으로 하여 그와 평행하게 남-북·동-서의 간선도로를 배치하고 외곽의 성벽을 따라 순환도로를 결합해서 구성하였다.

한국 도성의 기원은 위만조선의 도성으로 우거왕이 거주하였던 왕검성이 『사기(史記)』 조선전에 등장하고 있는데, ‘왕검성(王儉城)’은 바로 ‘왕성(王城)’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거(右渠)는 산세가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가 끊어지게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의 도읍이 산성에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도읍을 산성에 둔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의 예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 평지에 도성을 배치하고 있는 중국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 고구려(高句麗)
고구려 도성의 특징은 산성과 평지성이 서로 혼합된 것이라 하겠다. 평지성은 왕을 비롯한 지배계층의 평상시 거성(居城)이고 산성은 전시(戰時) 등 군사적 비상시에 지배계층 뿐 아니라 국인(國人)들이 모두 들어가 수성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동명왕이 환인(桓仁)의 오녀산성(五女山城 : 흘승골성, 紇升骨城)을 도성으로 삼았을 초기에 대해서는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 하고성자고성(下古城子古城)의 연대가 아직 확정되지 않아 논하기 어렵지만 서로 3㎞의 거리에 있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40년 후인 유리명왕(琉璃明王) 22년(A.D. 3)에 집안(集安)으로 도성을 정할 때인 중기부터는 이 특징이 선명히 나타난다. 환도성(丸都城)은 산에 축조되어 있고 국내성(國內城)은 산 아래의 평지에 있으면서 거리가 서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환도성은 몇 차례의 개보수로 인하여 규모가 크고 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으며 지세가 가파르기 때문에 방어하기에 용이하다. 그런데 425년이라는 기간 중에 고구려왕이 진정으로 이곳을 도성으로 삼은 것은 40년을 넘지 않기 때문에 절대 다수의 시간은 국내성에 머물렀을 것으로 보인다.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평양성(平壤城)으로 천도하였을 시에는 대성산성(大城山城)과 평지의 안학궁(安鶴宮)이 세트형식을 띠고 있으나, 양원왕(陽原王) 8년(552)에 축조하기 시작하여 평원왕(平原王) 28년(586)에 천도를 단행한 장안성(長安城)은 하나의 성 내부에 북고남저형(北高南低形)의 지세를 갖추고 북성, 내성, 중성, 내성 왕실, 중성 치소, 외성 주민지역을 순차적으로 나누어 나갔고 그 중에서도 외성은 중국의 조방제를 채용하여 일정하게 십자로로 구획한 발달된 도성형태라 하겠다.

2) 백제(百濟)
한성시대의 도성은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한산(漢山)→한성(漢城)으로 변천되었는데, 이제까지의 위치비정은 다음과 같다.


初都地
(河北慰禮城) 河南
慰禮城 漢 城 漢 山 遷都 經過 出 典
丁若鏞 三角山 東麓 廣州宮村
(現
春宮里) 河北慰禮城→
河南慰禮城→漢城 《與猶堂全書》彊域考 卷3 慰禮考, 1936
李丙燾 洗劍洞 一帶 春宮里 (春宮里) 南漢山城 河北慰禮城→
河南慰禮城(漢城)→
漢山→漢城 慰禮考,《韓國古代史硏究》1981 및 〈近肖古王拓境考〉, 同上書
尹武炳 二聖山城 〈漢江流域에 있어서의 百濟文化硏究〉,《百濟硏究》15, 1984
李基白 夢村土城 百濟文化 學術會議錄,《百濟文化》7 8合輯,1975
千寬宇 서울
江北 江南南漢山 北麓 河北慰禮城→河南慰禮城(以後 蓋鹵王21年까지 都城) 三韓考 第3部, 《古朝鮮史·三韓史硏究》,
一志社, 1980
成周鐸 漢江
以北 夢村土城(前期都城) 春宮里一帶(後期都城) 南漢山城 河北慰禮城→河南慰禮城→漢山→漢城 〈漢江流域 百濟初期 城址硏究〉《百濟硏究》14, 1984 및 〈都城〉《韓國史論》15,
車勇杰 中浪川 一帶 夢村土城·二聖山
사이 河北慰禮城→河南慰禮城(漢城)→漢山→河南慰禮城 〈慰禮城과 漢城에 대하여(Ⅰ)〉《鄕土서울》39, 1981
崔夢龍 權五榮 中浪川 一帶 夢村土城 春宮里 一帶 二聖山城 河北慰禮城→河南慰禮城→漢山→漢城 〈考古學的 資料를 通해본 百濟初期의 領域考察〉《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85
李道學 漢江 以北 夢村土城(王城)
風納土城(離宮城) 左同 北漢山城內 重興洞古城 河北慰禮城→河南慰禮城(漢城)→漢山→
河南慰禮城(漢城) 〈百濟 漢城時期의 都城制에 관한 檢討〉《韓國上古史學報》9,1992


이상을 보면 한성시대는 근초고왕 때 고구려 고국원왕을 사살한 후 고구려의 보복에 대비하기 위하여 도성을 산성인 한산으로 천도한 예 외에는 대체로 구릉성인 몽촌토성을 도성으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웅진도성(熊津都城)은 문주왕 1년(475) 고구려에 의한 한성의 함락으로 천도한 이후 538년 사비로 천도할 때까지 머물렀던 도읍지이다. 차령산맥으로 1차적인 자연방어선을 갖추고 있는 웅진도성(공주 공산성)은 표고 110m의 공산에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된 포곡식산성으로서 북쪽은 곧바로 금강(錦江)에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공주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천연적인 요충지로서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왕궁은 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다.

사비도성(泗비都城)은 성왕(聖王) 16년(538)에 웅진(熊津)으로부터 천도하여 의자왕(義慈王) 20년(660)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기까지 약 120년간 지속되었던 도읍지이다. 사비도성은 포곡식산성인 부소산성(扶蘇山城)과 외곽인 나성(羅城)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도성의 축조시기에 대하여서는 아직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사비도성으로의 천도는 성왕 16년(538)에 이루어졌지만 그 준비과정에 있어서는 동성왕(東城王) 8년(486)에서 동왕(同王) 23년(501)까지 부소산성 및 나성 등의 방어시설에 대한 축조가 거의 완비단계에 이르렀을 것으로 판단된다.

사비도성은 기본적으로 한성시대 이래 백제도성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을 보완해 배후 산성인 부소산성과 왕궁과 시가지를 포용한 나성으로 구성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으나 ‘항(巷)’과 같은 도시 설계상의 운용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중국 남조 도읍의 제도를 일부 수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부소산성에서의 포곡식산성은 웅진성에서의 포곡식산성의 축조술을 응용하여 발전시킨 것이며, 웅진시대에 왕궁이 웅진성 내에 있음으로 해서 불편했던 점을 감안하여, 사비시대에는 왕궁을 부소산성 밖에 시설하게 됨으로써 당시 백제로서의 독특한 나성을 축조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3) 신라(新羅)
신라 도성은 시종일관 경주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2년(101)에 월성(月城)을 축조하고 정궁(正宮)을 이 곳으로 옮겨 궁성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8년(475)에 명활성(明活城)으로 잠시 이거(移居)하였다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9년에 월성을 수리하고 그 이듬해인 488년 1월에 다시 월성으로 이거하여 계속 정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도성내 조방제의 실시는 자비왕 12년(469)에 이루어졌는데 360방(坊) 35리(里)로 구획되었는데, 그 규모는 동서 160m, 남북 140m의 방안이었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같이 왕경을 둘러쌓은 외곽(나성)이 없는 반면에 사방에 산성을 축조하여 도성 방위를 시도하였다. 즉 동에는 명활산성(明活山城)이, 서에는 서형산성(西兄山城)과 부산성(富山城)이, 남에는 남산신성(南山新城)이, 동북에는 북형산성(北兄山城)이 축조되어 나성(羅城)의 역할을 하였다. 통일 직후 문무왕(文武王)은 즉위 21年(681)에 도성을 크게 건설하려다가 의상법사(義相法師)의 만류로 그 역사(役事)를 중지한 바 있다.

4) 발해(渤海)
발해의 첫 도읍지는 성산자산의 중턱에 타원형으로 축조된 동모산성(東牟山城)이며, 그 후 중경과 상경 등 도성을 몇 번 옮기고 있는데 그 중 약 200여 년에 걸쳐 도읍한 곳은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이다. 상경의 평면은 장방형으로 성벽의 길이는 16,295m이다. 성문은 동·서에 각 2개소, 남·북에 각 3개소로 10개소가 설치되었고, 성내 북측 중심에 궁성이 자리하고 있으며, 11조(條)의 대도(大道)를 중심으로 구획된 방리(坊里)가 시설되었다. 내성의 남문에서 외곽의 남문을 연결하는 주작대로의 너비는 110m에 달한다. 외곽의 바깥쪽에는 호(濠)가 둘려져 있다.

5) 고려(高麗)
고려의 도성은 개경으로 태조 2년에 도읍을 여기에 정하고 개주(開州)라 하였으며, 광종(光宗) 11년에 황도(皇都)라 하였다가 성종(成宗) 14년 다시 개성부(開城府)라고 하여 500여 년간 번성하였다. 개경에는 궁성(宮城)과 황성(皇城) 외에는 성벽을 축조하지 않고 천험(天險)에 따라 방위하려고 하였으나 현종(顯宗) 때에 거란의 침구(侵寇)로 궁궐과 민호가 모두 분탕(焚蕩)하여, 강감찬의 요청에 따라 왕가도 등에 명하여 나성(羅城)을 축조하여 현종 20년(1029)에 완성하였다. 그리고 우왕(禑王) 3년에 개경이 바다에 가까워서 왜구의 피해가 우려되어 도읍을 내지(內地)에 옮길 것을 의논시켰는데, 최영이 제안하기를 도성이 너무 넓어 10만 병력으로도 방어하기가 쉽지 않으니 내성을 축조하여 불의의 우환에 대비하여야 한다고하여 내성(內城)을 축조하기로 하고 배극렴으로 이를 감독케 하였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중지되었다가 조선조 태조 2년에 완성되었다. 이리하여 개경은 궁성, 황성, 내성과 외곽을 갖춘 도성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며, 자연 지형에 따라 축조되어 전통적인 산성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성문은 궁성에 승평문, 동화문, 서화문, 현무문 등 4개소, 황성에 광화문 등 11개소, 내성에 남대문 등 8개소, 외성에 동대문(숭인문) 등 25개소가 설치되었다.

고려중기 말엽에는 몽고(蒙古)로부터의 병화를 피하고 장기적인 항전을 하기 위하여 강도(江都:강화도)로 천도하였는데, 강도의 도성은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의 3중으로 축조되었으며, 개경의 만월대와 방불한 지형을 택하여 궁궐을 건축하였다.

6) 조선(朝鮮)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재위 3년(1394)에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여 궁궐(宮闕), 종묘(宗廟), 사직(社稷) 및 관아(官衙) 등을 건설하고, 1395년에는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을 책임자로 하여 도성을 축조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5년(1396) 1월 9일에 59,500척의 성기(城基)를 1구간 600척씩 총 97구간으로 나누고, 민정(民丁) 118,070명을 동원하여 축성공사를 진행하여 2월 28일까지 49일 동안에 끝내게 되었다. 그러나 흥인문(興仁門) 부근에는 지형이 낮고 웅덩이로 되어 있어 공사가 완성되지 못하였으며, 7월의 폭우로 도성 수구(水口)및 옹성(甕城)과 성벽이 무너져, 그 해 8월 6일부터 민정(民丁) 79,400명을 동원하여 권중화 등으로 감독케 하는 제2차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4일에 공사를 완성하였다. 도성의 평면은 궁성을 중심으로 대체로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성벽은 북악(北岳), 낙산(駱山), 남산(南山), 인왕산(仁旺山)의 능선과 평지를 연결하여 축조한 평산성의 형태이다. 8개소에 성문(城門)을 시설하였으며, 정연하지는 않지만 지형조건에 따라 직선대로가 얼마간 ‘十’자형을 이루고 있다. 그 후 세종(世宗)과 숙종(肅宗)때에 대대적인 수축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세종 때에는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을 두고 8도 장정 322,400명을 동원하여 토축부분을 모두 석축으로 고쳐 쌓았다.

이와 같이 역대 한국의 도성은 산성을 이용한다든지 또는 평지도성과 산성을 결합시키는 형태를 띠고 있다든지, 평산성을 축조하고 있는 것은 자연지형을 이용한 방어의 극대화를 꾀한 것으로 전통적인 산성축조의 영향에서 연유된 것이라 하겠다.

 

산성

산성(山城)의 기원(起源)

한국에서의 산성의 기원은 『사기(史記)』에 의하면, 위씨조선 말에서부터 그 존재가 기록되고 있다. 즉 한 무제가 위씨조선을 공격할 때에 『왕검성(王儉城)』에서 1년 가까이 저항하게 되는데 “우거(右渠)는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가 끊어지게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왕검성이 산성일 가능성만 추측할 뿐이다. 아직 한국 산성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는 단계이다. 그러나 『삼국지(三國志)』에 이르면 분명히 그 존재를 살필 수 있다. 즉 부여조(夫餘條)에는 “성책(城柵)은 둥글게 만들어서 마치 감옥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고, 고구려조에는 “이 성을 책구루(책溝루)라 부른다. 구루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동옥저에는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고 하고, “동부도위를 설치하고 불내성(不耐城)에 치소를 두었다.”고도 기록하고 있으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루)라고도 한다.”고 하여 이 시기에 성곽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삼한 중 진한조와 변진조에는 “성곽이 있다”고 하여, 성곽의 존재를 알 수 있지만 (마)한조에는 “성곽은 없었다.”고 하고 있어 유독 마한에만 성곽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마)한조를 잘 살펴보면 뒷부분에 “국중(國中)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官家)에서 성곽을 쌓게 되면”이라고 하여 성곽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성곽이 어떠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규모는 어떠한지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마한에도 성곽이 있었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최근에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부여 송국리(松菊里)에서는 B.C. 5세기경 집자리를 보호할 목적으로 목책(木柵)을 시설한 유적이 밝혀지고 있어, 상기 기록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국을 대표하는 성곽은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산성은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고 영토를 보전하기 위하여 지리적 요충지에 축조하는 시설물이다. 산성을 쌓고 지키게 되면 전술·전략적인 측면에서 몇 가지 유리한 점이 있다. 그것은 평지에 성을 쌓고 지키는 것보다는 아군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반면에 적군의 장점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적군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우세한 인원과 우수한 장비를 준비하여 가지고 간다 하여도, 힘들여 산 위를 기어올라가다 보면 목적지에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이미 기력이 쇠진하여 막상 전투 시에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성 안에 있는 아군의 사정을 파악할 길이 없어 작전에 어려움이 수반된다. 반면에 아군은 지형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최악의 경우 농성만 한다하더라도 적을 퇴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 산성을 중심으로 축조하고 있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보장왕 6년조에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축조하였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고, 『고려사(高麗史)』에 “당감(唐鑑)에는 고(구)려에서 산을 이용하여 성을 축조하는 것을 상책(上策)이라 하였으니, 외방(外方)의 평지에 성을 축조하는 것을 마땅히 정파시켜야 합니다.”라고 한 기록에서 그 효용성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당시의 산성은 그 용도와 기능면에서 볼 때 단순히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는 전략적인 요새로서의 기능뿐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지방행정 통치의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하였다고 보여진다. 이와 같은 산성의 중요성은 삼국시대 뿐만 아니라 고려·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논의되고 있다. 특히 조선 전기 및 양란(兩亂)을 전후한 시기에 산성에 대한 여러 가지의 논의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다수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산성(山城)의 형식구분(形式區分) : 산성의 형식에 대하여서는 조선 후기 실학자 중의 대표적인 학자로 꼽을 수 있는 다산 정약용의 저서 『민보의』에서 산성의 축조에 유리한 지형을 고로봉형(고로峰形), 산봉형(蒜峰形), 사모봉형(紗帽峰形), 마안봉형(馬鞍峰形)의 4가지 형태로 꼽았다.

첫째, 고로봉형(고로峰形)은 사방이 높고 중앙부가 낮은 분지형의 지형이다. 산성의 축조에 가장 적합한 지형으로 꼽았는데 그 이유는 산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적의 방어에 용이할 뿐만이 아니라 평지에 축조한 성에서처럼 겹겹이 성을 쌓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성 내부는 오목한 골짜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성벽 위에서는 적의 움직임을 쉽게 관찰할 수가 있으나 성 밖에 있는 적은 성 안의 사정을 알 수가 없어 전투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골짜기 안에는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가 있고, 물을 비롯하여 전투에 대비하기 위한 여러 물자를 마련 보관하기 좋은 지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산봉형(蒜峰形)으로서 마늘의 모양처럼 정상부가 평탄하고 넓은 반면에 외곽부는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지형이다. 셋째는 사모봉형(紗帽峰形)인데 이는 사모관대의 형태와 비슷하게 전방이 낮고 후방이 높은 지형을 이루고 있는 지세를 갖춘 지형이다. 넷째는 마안봉형(馬鞍峰形)으로서 2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말안장과 같이 양쪽이 높고 가운데가 잘록하게 낮아진 지형이다.

위와 같은 다산의 분류는 구한말인 고종 연간에 병조판서, 훈련대장 등을 역임한 바 있는 신헌에게 계승되었는데, 그는 부적합한 지형에 대하여도 다음과 같은 9가지 요소를 들고 있으니, ① 적으로부터 관측될 정도로 상대적으로 낮은 지형. ② 한 면은 가파르고 다른 한 면은 경사가 완만하여 적으로부터 배후기습이 우려되는 지형. ③ 인접해있는 보(堡)나 산성과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심산유곡 중에 있는 산. ④ 접근로가 단 하나뿐인 산. ⑤ 수원(水源)이 없는 산. ⑥ 전라도의 입암산성처럼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고 매우 높은 산. ⑦ 적의 화공(火攻)이 염려될 만큼 수풀이 연이어 우거진 곳. ⑧ 양쪽 봉우리를 모두 수비할 수가 없는데도 그 양자간의 거리가 궁시(弓矢)의 유효사정거리 안에 있는 산. ⑨ 돌, 나무 등 보(堡)를 축조하거나 방어에 필요한 재료가 없는 산 등을 거론하고 있다.

이를 감안할 때 산성의 형태는 주로 산성이 위치한 입지조건과 성벽의 통과선이 구체적으로 택하는 지형에 대한 이용방법을 기준으로 하여 산정식(테뫼식)과 포곡식의 두 가지 계통으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다시 이 두 가지 형식을 복합한 복합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산정식산성(山頂式山城) 산정식 산성을 몇 가지 입지적인 특징을 가지고 구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산중복보다 높은 위쪽에 잡았으며 산봉우리를 둘러싸서 마치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처럼 원형으로 성벽을 구축한 것을 테뫼식이라 할 수 있으며, 정약용의 산봉형과 마안봉형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산봉형은 하나의 봉우리를 포용하고 있는 산성의 형식으로, 이 산봉형으로 산성을 구축하게 되면 성벽이 산정상 아래 부분에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적이 공격하기 어렵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외부의 적에게 노출될 염려가 있을 뿐만이 아니라 성 내부에 사람들이 거주할 수가 있는 평탄지를 확보하기가 어렵고, 수원의 확보 등에도 난점이 있어 많은 병력이 장기간 주둔하기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하나의 봉우리를 포용하고 있는 산성은 대체로 연락용, 감시용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마안봉형은 인접하여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를 연결하여 산성을 축조하는 형식으로 산봉형의 단점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는 형식이라 하겠다.

둘째는 평탄하게 생긴 산정상부를 둘러서 구축한 경우는 순수한 산정식이라 할 수 있는데, 정약용의 고로봉식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 산정식으로서 체성을 축조하게 되면 성벽이 산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적의 공격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성 내부의 동정이 적에게 노출될 염려가 적다는 장점이 있다.

셋째는 산정상부에서 성벽이 시작하여 산능선을 따라 내려와 한쪽 산복에 걸쳐 완만하게 경사된 지형을 이용하여 비교적 넓은 면적을 포용하고 다시 산능선을 따라 산 정상부로 올라가며 구축된 것을 산복식이라 할 수 있겠다. 정약용의 사모봉형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 형식은 테뫼식 및 산정식산성의 단점인 성 내부의 공간 확보 및 수원 확보 등의 문제점들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산복식산성 내부에는 많은 병력의 장기적인 주둔과 관련된 것으로 보여지는 수 개소의 건물지가 반드시 발견되고 있다. 또한 산복식산성은 거의 대부분이 석축기법에 의하여 축조되었다는 것을 또 하나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따라서 이 형식은 테뫼식이나 산정식산성보다 뒤늦게 출현한 형식이라고 하겠다. 또한 산복식산성은 포용하고 있는 면적의 규모에 따라서 그 내부에는 조그만 계곡을 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어 종종 포곡식산성과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넷째는 평탄한 산정상부를 이용한 산성들 중에는 평지에 고립된 낮은 구릉상에 입지한 것을 볼 수 있으며 이 범주에 속하는 산성의 특징은 낮은 구릉 위에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이 축조되어 있으나 문지 및 수구가 평지에 접근하여 시설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성곽을 평산성(平山城) 또는 구릉성(丘陵城)이라 할 수 있다.

2)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 포곡식산성은 성내에 1개 또는 그 이상의 계곡을 포용하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산줄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하였다. 따라서 성벽의 통과선은 산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평지에 이르며 이 성벽은 다시 평지에서 능선을 따라 정상부에 오르게 되며 그 기복에 있어서 보다 변화가 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포곡식산성의 평면형태는 원형 또는 타원형을 띄고 있는 테뫼식 또는 산정식산성과는 달리 불규칙적인 부정형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계곡을 흐르는 수류(水流)는 한곳으로 모아져서 평지에 가까운 위치에 시설된 수구(水口)를 통하여 성외로 유출하게 된다. 따라서 성내에는 연못이 한 곳 이상 설비되게 된다. 이 형식은 내부에 넓은 평탄지와 계곡 및 수원을 포괄한 축성법인 만큼 전자의 산정식보다 훨씬 광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어 보다 많은 인원이 성 안에서 장기간 주둔할 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고구려 성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3) 복합식산성(複合式山城) 산정식과 포곡식의 두 형식이 결합해서 성립된 유형을 복합식산성이라고 한다. 이 산성은 규모에 있어서 협소할 수밖에 없는 산정식산성에, 어떠한 목적에 의해서 그것을 크게 확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바로 인접된 지형에 포곡식산성을 접속하여 개축함으로서 만들어진 새로운 형식의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현재까지 조사결과 밝혀진 유적으로는 직산 사산성, 서천 건지산성, 남양 당성, 부여 부소산성·석성산성의 5개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부소산성은 포곡식산성이 백제시대에 축조되었고, 군창지 소재 테뫼식산성과 사비루 소재 테뫼식산성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었음이 밝혀져, 이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거론되고 있다.

토축산성(土築山城)
1) 삭토(削土)에 의한 축조기법(築造技法) 산정식산성에서 많이 나타나는 방법으로 자연적인 급경사면을 깎아내어 성체로 이용하는 형식이다. 정약용의 고로봉형 산성같이 사방이 높고 중앙부가 낮은 분지형의 지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축조기법이다. 대부분의 삭토는 산 정상부의 외곽에 형성된 경사면의 내·외부를 ‘L’자에 가깝게 깎아내고 다시 그 깎아낸 흙을 이용하여 성토나 도축(搗築)으로 성체의 낮은 부분을 보완하여 바깥쪽은 높고, 안쪽은 상대적으로 낮은 벽면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성내에는 수류(水流)로 인한 성체의 유실을 방지하고, 군사들의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내호(內壕)로 보이는 통로가 형성되어 있다. 성벽 상부에는 방어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목책(木柵)이나 목익(木헖) 혹은 녹각성(鹿角城) 등을 시설하는 경우도 있다. 이 삭토에 의한 축조기법은 공역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 성토(盛土)에 의한 축조기법(築造技法) 고대 토축산성을 축조하는 방법 중에서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획정된 성기(城基)의 내·외면을 ‘U’자형으로 파내어 그 곳에서 나온 토량을 성토하여 성체를 구축하는 형식으로, 구조상의 특징으로는 내황(內隍)과 외황(外隍)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라 하겠다. 대개 성벽을 2중으로 구축하였다는 기록은 바로 성토법에 의한 토축산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성토법에 의한 성벽 축조방법은 테뫼식산성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식이다.

3) 판축(版築)에 의한 축조기법(築造技法) 판축기법(版築技法)은 동양 고대건축사에서 특이하게 발달된 토목공법의 하나이다. 이 공법은 용산기(龍山期)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은(殷) 중기의 유적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이 방법이 다방면으로 활용되었으며 건축의 기단을 비롯하여 묘광의 전토(塡土), 성벽 등을 축조할 시에 사용되었다. 문헌기록으로 남아 있는 판축기법의 예는 주초(周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시경』 대아 문왕지십 면편(綿篇)에는 문왕의 풍경(豊京)건설에 대해 노래하는 내용 중에 판축기법으로 성벽을 쌓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삼태기에 흙을 많이 많이 담아다 축판(築板) 안에 빨리 빨리 쏟아 넣어서 이것을 다같이 다져서 올리고 담이 중복된 곳은 깎아내고 단단하게 하여 모든 담벽을 금방 세우니 역사를 권하는 큰 북이 당하지를 못하더라(구之잉잉 度之薨薨 築之登登 削屢馮馮 百堵皆興 고鼓弗勝)”한 것이 그것이다. 한편 고고학적인 자료상으로 보면 河南城 鄭州 白家莊에서 발견된 상대(商代) 조기(B.C. 1600년경) 성벽의 판축기법이 가장 이른 예로 밝혀져 있다.

『영조법식』에는 이 판축기법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성체의 길이 7자 5촌마다 영정주(永定柱)와 야차목(夜叉木)을 2개씩 사용하며 성벽의 높이를 5자씩 축조하고 그때마다 횡목(橫木) 1개를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협판(夾板)은 매 3자마다 새끼로 묶어서 그 새끼의 한쪽 끝을 판축성체 내부에 박은 쐐기에 고정한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국에 이것이 도입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며 특히 백제에서 널리 보급되었다. 판축에 의한 축조기법은 성체를 구축하는데 있어서는, 먼저 지형이 경사면이든 내외의 높이 차가 없는 평지에 있어서든 성벽이 지나갈 통과선을 수평으로 정지하고, 일정한 판축 구간마다 협판을 세우고 기둥으로 고정시킨 후 일정한 두께씩 층을 이루도록 점질토와 사질토를 교차로 다져가면서 수평으로 쌓아 올려서 성체를 수직에 가깝게 이루는 형식이다. 이와 같이 성체를 구축하기 위하여서는 협판(夾板), 목주(木柱)가 구비되어야 하며, 성벽을 보호하기 위하여 기초부에 호성석축(護城石築)이 축조되기도 하고 혹은 석열(石列)이 1단 내지 2단 정도 놓여지기도 한다.

정약용은 『여유당집』에서 협판을 세우는 목적이 판축성체를 구축하기 위한 목적 외에도 하나는 성벽 두께의 기준으로 삼고, 하나는 흙을 쌓는 높이의 기간(基幹)을 삼고자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이 협판의 두 머리를 연결하고 판자 사이에 흙을 한겹 한겹 채워서 목봉으로 두드려 축조하는데, 그 협판의 두 머리를 연결하였던 목재의 흔적이 부소산성 발굴조사시에 확인되었다. 보고자는 이것을 횡장목(橫長木)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중국 河北省 易縣 燕下都의 발굴보고에서는 이 횡장목을 천혼(穿棍)이라고 하며, 그것이 부식됨으로서 생긴 구멍을 혼안(棍眼)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협판의 두 머리를 끈으로 묶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하겠다. 판축토를 목봉으로 다지는데 있어서는, 금강사지(金剛寺址) 목탑지의 예를 보면 그 판축층 상면에 직경 3~4㎝의 막대기 끝으로 두드려 다진 압흔이 남아 있는데, 이 원형의 ‘凹’흔적을 중국에서는 와자(窩子)라고 부르고 있다 한다. 한편 『중국고대건축사』에서는 흙을 다지는 목봉을 항저(항杵)라고 하고 있으며, 원형의 ‘凹’흔을 항와(항窩)라고 하고 이 항와(항窩)의 직경은 3㎝인데, 판축층은 모두 수평이며, 층의 두께는 약 7~10㎝로 상당히 견고하다고 하고 있다. 정약용은 축성에 사용할 흙의 성질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는데, 점질토와 석비레를 교합하여 축조한 토성이 가장 좋다고 하고 있다. 또한 협판의 흔적은 니토(泥土)와 회삼물(灰三物)로 그 겉면을 보축하며, 그렇게 할 수 없으면 큰 석재를 진흙과 같이 쌓고 다시 판자 사이를 흙으로 다진다고 하고 있는데, 판축성곽 조사시에 판축성체 벽면에 피복을 입힌 것이 확인되고 있어 이러한 구축방법은 삼국시대로부터 전래되어 온 것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한편, 『통전』 수거법에는 성체의 규모와 공력의 소요인원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성 기저부 폭은 성 높이의 반으로 하고, 상부 폭은 성 기저부 폭보다 반으로 하면, 성벽의 높이 5장(丈), 기저부 폭 2장(丈) 5척(尺), 상부 폭 1장 2척 5촌(寸)이 된다고 하고, 높고 낮음과 넓고 좁음은 이것으로 기준을 삼는다고 하고 있다. 『통전』이 편찬된 당대(唐代)에는 1척에 28~31.3㎝를 적용하고 있으므로, 성벽의 높이는 14~15.65m, 기저부 폭은 7~7.83m, 상부 폭은 3.5~3.91m로 환산할 수 있다. 또한 이와 같은 규모로 1척(28~31.3㎝)을 축조하는데, 매 1사람의 공력이 하루에 2척의 흙을 쌓는다는 것을 가정하여 하루에 47명의 공력이 필요함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세종 3년에 도성수축도감이 보고한 문건에는, 도성을 수축하는데 토성은 매 자(尺)당 각 15명씩의 인력이 소요되며, 석성은 매 자당 각 5명씩의 인력이 소요된다고 하여 토축이 석축보다 3배의 공력이 들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수치는 수축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축성재료가 이미 준비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나, 축성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이 생략된 상태에서는 토축성이 석축성보다 더 많은 공력을 요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현재 판축에 의한 축조기법으로 구축된 성곽유적으로는 몽촌토성, 공주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 목천토성, 직산 사산성, 결성 신금성, 익산 오금산성, 나주 회진토성(신풍리 토성), 양산 순지리 토성, 울주 화산리 성지, 길림 용담산성, 무순 고이산성 등이 있다.

참고문헌 백제도성연구(朴淳發, 百濟歷史再現團地造成調査硏究報告書, 考古美術分野Ⅰ, 忠淸南道, 1996), 百濟 泗 都城의 築造時期에 대한 一考察(沈正輔, 東北아시아의 古代都城, 東亞大學校開校50周年紀念 國際學術大會 發表論文集, 1996), 백제 산성연구(沈正輔, 百濟歷史再現團地造成 調査硏究 報告書, 1996), 中國古代建築史(劉敦楨 著·鄭沃根 外 共譯, 1995), 扶蘇山城 發掘調査 中間報告(扶餘文化財硏究所, 1995), 韓國邑城의 硏究(沈正輔, 學硏文化社, 1995), 百濟城郭의 類型과 築造技法(孔錫龜, 大田의 城郭大田直轄市, 1993), 申櫶의 國防論(朴贊植, 歷史學報 117, 1988), 韓國城郭의 硏究(孫永植,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7), 木川土城(尹武炳, 1984), 民堡議 民堡擇地之法(丁若鏞, 與猶堂全書 遺補 3), 堡制 2(申櫶, 民堡輯說), 《史記》, 《三國志》, 《三國史記》, 《高麗史》, 《通典》守拒法, 《世宗實錄》卷13, 3年 10月 戊午條, 築城堞(丁若鏞, 與猶堂集 卷181)

출처 : 황세옥의 전통건축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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