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8년 만에 나온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지난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는 친일행위자 4389명의 ‘행적’이 고스란히 재현돼 있다. 후손들 반발이 거센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몇몇 유족들은 <친일인명사전>을 입수해 꼼꼼히 살펴본 뒤 민족연구소를 상대로 출판물 명예훼손 소송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 ‘친일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모른 체 시치미 떼는 몰염치 후손도 있다. 대부분 경제인 친일행위자 유족들이 그렇다. 친일파 명단에 오른 경제인은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를 비롯해 △김연수 삼양그룹 창업주 △보광그룹 홍진기(홍석규 회장의 조부) △현대그룹 현준호(현정은 회장 조부) 등 모두 55명.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경제인들의 친일행위에 대해 차례대로 알아봤다. 다음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재벌’ 시리즈 제1탄 두산그룹 창업주 박승직의 친일사례다.
일부 학계와 친일문제 전문가들은 박승직 두산 창업주를 △매판 상인자본가의 전형 △창씨개명 한 친일기업인 △전쟁협력자 △경제계 대표 친일파라 부른다.
학계에 따르면 박 창업주는 1934년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선인사흥신록’에도 이름이 올라와 있다. 조선인사흥신록은 일제치하 때 공로가 많은 유명 인사나 유지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홍보책자다.
실제 박 창업주는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을 맡으며 일본 전시체제 구축에 힘써온 이력이 있다.
박승직 두산 창업주의 일생을 되짚어봤다.
◆‘박승직상점’ 두산그룹 모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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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 |
| 1864년 6월22일 경기도 광주 농촌마을, 박 창업주는 가난한 농민 박문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박문회는 땅 한 평 없는 소작농이었다. 당시 세도가인 여흥민 씨의 밭을 부쳐 먹으며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였다.
박 창업주가 기를 쓰고 돈을 번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열아홉 어린나이에 보따리 장사를 하게 된 데는 후손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그의 결의가 한몫했다.
한강 송파나루에서 면직물을 취급하던 박 창업주는 전남지방을 중심으로 세를 넓히기 시작했다. 등짐장사와 면포상, 보부상 등 닥치는 대로 일만했다. 그 결과 박 창업주는 1896년 8월1일 서울 배오개(현 종로4가 광장시장 부근)에 자신의 이름을 딴 ‘박승직상점’을 열게 된다. 밑바닥 생활 15년 만에 마련한 가게였다.
이후 박 창업주는 포목상으로 대성공했고, 동대문과 종로 일대에서 ‘배오개의 거상’이라 불렸다. 1906년에는 중추원 의관과 정3품에 승서되는 등 이미 거상으로서 황실의 인정을 받을 정도였다.
1905~1910년 사이 ‘박승직상점’은 크게 성장해 면포의 판매망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당시 박 창업주의 창씨명은 ‘미키쇼우쇼크’. 이 시기는 우리나라 역사 중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대이기도 했다.
1917년 ‘박승직상점’은 면포 판매에 판촉물로 <박가분>을 내놓는다. 박가분은 한국 ‘관허’ 제1호 화장품으로 일제화장품보다 싸게 개당 50전(요즘 돈 5000원)에 팔리며 큰 인기를 누렸다. 여기서 ‘관허’는 물론 조선총독부를 뜻한다.
박가분은 1926~1930년 사이에 불티나게 팔렸다. 박가분 때문에 박승직 포목점은 북촌상가에서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박가분은 화장의 부착력을 높이려고 넣었던 납 파동으로 1937년 생산을 중단하고 만다.
◆일조협동기업의 개척자
여기까지만 보면 박 창업주는 맨손으로 시작해 온갖 시련을 딛고 성공한 훌륭한 기업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때 시대 상황을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박승직상점’이 승승장구하던 1905년은 우리나라가 화폐금융공황에 빠져 허우적대던 시기였다. 조선정부의 재정고문으로 한국에 건너온 메가다 쇼타로에 의해 화폐정리가 시작되면서 조선인들의 화폐 가치는 뚝 떨어졌다.
한 친일문제 전문가는 화폐정리를 두고 “조선 상인들의 파산을 목적으로 한 일종의 제도적인 폭력이었다”며 “일본은 근대화된 대규모 생산시설에서 생산한 값싼 면직물로 조선에 대대적 공습을 가해왔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조선인 면직물 포목시장은 경쟁력을 잃고 좌초될 위기에 놓였다. 조선의 대표 포목상이던 박 창업주는 일본에 대항키로 결심했다. 1905년 7월 조선인 상인들을 모아 ‘경성(한성)상업회의소(현 대한상공회의소)’를 결성해 전면으로 부닥쳤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경성상업회의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와해되고 말았다.
조선의 포목시장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일본의 대형 방직회사들이 시장을 독점, 상품가격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1905년 일본 방직사들은 폭리를 목적으로 ‘미에이’ 판매동맹을 결성, 미쓰이물산에 위탁하면서 면포수출을 독점했다.
박 창업주 또한 미에이조합에 맞서기 위해 조선인 포목상 88명과 함께 1906년 10월 ‘창신사’라는 합병회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방해 공작으로 ‘창신사’의 앞날은 캄캄하기만 했다.
박 창업주가 친일행위자로서의 첫 발을 디딘 것도 이 때쯤이다. 일찌감치 ‘창신사’의 싹수를 내다본 박 창업주는 1907년 8월 이곳을 탈퇴, 직접 일본과 거래하기 위해 ‘공익사’란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특히 박 창업주는 일전의 실패를 면하기 위해 일본인 니시하라를 적극 기용, 알선책으로 쓰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니시하라를 알선책으로 내세운 박 창업주의 ‘묘책’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박 창업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들 사이에서 믿을 만한 ‘조선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일례로 공익사 설립 초,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제일은행 일본인 지점장에게 ‘박승직을 도와주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일본에 뒤통수 맞은 사연
‘공익사’의 발전은 눈부셨다. 1908년 공익사는 인천, 수원, 개성, 안성, 부산 등에 대리점을 개설하며 이토 추상사와 첫 거래를 시작했다. 이후 설립 1년만에 자본금 1만원이던 회사는 2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또 1910년에는 이토 추상사와 합자해 자본금을 4만6000원으로 증자, 3년 새 자본금을 5배 가까이 늘렸다. 주식회사로서의 변화를 꾀하기 직전인 1914년 공익사 자본금은 50만원이었다.
공익사가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일 밖에 모르던 박 창업주 몰래 그동안 이토 추상사가 수작을 부린 것이다. 어느 덧 공익사 주식 절반이상이 이토 추 계열로 넘어가 있었다.
박 창업주가 이토 추상사의 사악한 속내를 알게 된 것은 만주 대리점을 낼 때인 1919년. 이토 추상사는 최대주주라는 점을 이용해 만주 내 모든 사업권을 요구했다.
박 창업주로서는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당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박 창업주의 공익사가 결국 이토 추상사의 만주진출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 데 지나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친일인명사전>에 박 창업주가 실린 것과 관련 “당시 시대적 상황에선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라며 “주권을 잃은 기업인으로서 기업 활동을 하기 위해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는 점도 이해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실제 박 창업주는 조국을 위한 일이라면 두 팔을 걷고 앞장서기도 했다.
1907년 2월21자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박 창업주는 국채보상운동에 가장 먼저 앞장서며 상당금액을 나라에 기부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를 예속하기 위해 한국정부에 억지로 많은 돈을 꿔줬다. 그때 나라가 진 빚는 무려 1300만원이나 됐다. 국채보상운동은 이때 나온 주권수호운동이다. 국채를 상환해 국권을 되찾아 오자는 것이 골자다.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국채보상운동에 가장 먼저 참여한 재계인사는 뜻밖에도 박 창업주였다. 박 창업주는 그때 돈 70여원을 선뜻 광문사에 기부했다.
박 창업주의 보이지 않는 선행은 계속됐다. 1928년에는 낡고 쇠퇴한 보신각을 보고 솔선수범해 개인돈을 출연, 기부하기도 했다.
또 나라 잃은 왕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한 운동도 전개했다. 박 창업주는 자신이 조합장으로 있던 경성포목조합을 중심으로 조선상민봉도단을 결성, 1919년 고종과 1925년 순종의 장례를 대신 치러주기도 했다. 박 창업주는 당시 그때 돈 10만원을 장례비용으로 내놓았다. 이 밖에도 박 창업주는 △1928년 조선물산장려운동 △1925년 조선상공인 협동조합 결성 △1942년 경성상공협회 회장직 자진 사퇴 △1944년 조선청년 강제일제징용 구명 등에 앞장서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