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예송논쟁(禮訟論諍)

진가 2010. 8. 2. 11:24

예송논쟁(禮訟論諍)


 왕실의 의례 문제, 즉 상복 입는 기간을 문제로 하여 일어났으며, 당파적인 다툼 및 문중간의 다툼으로 비화되었다. 

 궁중의례를 둘러싼 논란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여러 차례 있었다. 현종대 두 차례의 예송의 배경은, 각 학파 내지 정파 사이에 있던 예학적(禮學的) 기반의 차이였는데, 이후 정국의 변동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사건이다. 이는 17세기의 조선 사회에서 이념적 규정성이 정치적 ·사상적으로 큰 변수로 작용하였음을 뜻한다.

1차 예송논쟁
1차 예송(기해예송)은 효종이 죽은 뒤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효종의 상(喪)에 어떤 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논란이었다. 조선 사회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에 근거한 예론(禮論)에서는 자식이 부모에 앞서 죽었을 때 그 부모는 그 자식이 적장자(嫡長子)인 경우는 3년상을, 그 이하 차자일 경우에는 1년상을 입도록 규정하였다. 인조는 첫째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차자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따라서 효종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왕통은 인조-효종으로 이어졌지만 적장자(적장자가 유고시 적장손)가 잇는 관념에서는 벗어난 일이었다.

여기에 1차 예송의 예론적 배경이 있다. 즉, 왕가라는 특수층의 의례가 종법(宗法)에 우선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관점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었다. 효종의 즉위와 같은 왕위계승에 나타나는 종통의 불일치를 성서탈적(聖庶奪嫡)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기왕의 적통이 끊어지고 새로운 적통에 의해 왕위가 이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는 왕위계승이 종법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를 종법 체계 내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으로, 왕가의 의례라 할지라도 원칙인 종법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관념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규정에 의거할 경우, 효종은 왕통상으로는 인조의 적통을 이었지만 종법상으로는 인조의 둘째아들이므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는 당연히 종법에 따라 1년상을 입어야 할 일이었다.

송시열(宋時烈) 및 유계 등을 중심으로 한 서인 계열에서 1년상을 주장한 데 반하여 남인 계열에서는 윤휴(尹稶)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 등이 그러한 주장을 반박하고 나옴으로써 1차 예송이 본격화되었다. 남인측의 주장은 차자로 출생하였더라도 왕위에 오르면 장자가 될 수 있다는 허목의 차장자설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논리는 천리(天理)인 종법이 왕가의 의례에서는 변칙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남인측의 주장은 “왕자예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효종은 당연히 장자가 되는 것이며, 자의대비는 효종을 위하여 3년의 복을 입어야 할 것이었다. 서인과 남인의 왕실전례에 대한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단순한 예론상의 논란이 아니라, 그들이 우주만물의 원리로 인정한 종법의 적용에 대한 해석의 차이였으며, 이는 현실적으로는 권력구조와 연계된 견해 차이였으므로 민감한 반응으로 대립한 것이다.

1차 예송은 예론상으로는 종통문제를 변별하는 것이 핵심을 이루었으나, 결국 《경국대전》에 장자와 차자의 구분 없이 1년복을 입게 한 규정(국제기년복)에 의거하는 것으로 결말지어졌다. 결과적으로는 서인의 예론이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서인정권은 현종 연간에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종법질서에 있어서 효종의 위상에 대한 논란은 결론을 보지 못하였으며, 이 문제는 결국 2차 예송의 빌미가 되었다.
2차예송논쟁
2차 예송(갑인예송)은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趙大妃:자의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졌다. 1차 예송에서는 국제기년복(國制朞年服)이 채택됨으로써 효종의 장자 ·차자 문제가 애매하게 처리되었으나, 인선대비가 죽으면서 이 문제가 다시 표면으로 떠올랐다. 즉 효종을 장자로 인정한다면 인선대비는 장자부이므로 대왕대비는 기년복(1년)을 입어야 하지만, 효종을 차자로 볼 경우 복제는 대공복(大功服:9개월)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기년복으로 정하였다가, 다시 꼬리표를 붙여서 대공복으로 복제를 바꾸어 올렸다. 현종은 예조에서 대공복제를 채택한 것은 결국 효종을 차자로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 잘못 적용된 예제로 판정하였다. 이후 송시열계의 서인세력이 대대적으로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결국에는 남인정권이 들어서는 계기를 이루었다.

  1차 논쟁은 서인들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2차 논쟁은 남인들이 승리했다. 뿐만 아니라 15년 전의 상복도 3년복으로 고치는 것으로 결정났다. 이는 현종의 단안에 의한 것으로 ,현종은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게 하면서 누구에게 후하게 할 것이냐"면서 서인들을 내좇고 남인들에게 정권을 넘겼던 것이다.

 

 결국  1차 아들이 죽었을 때 어머니의 상복과 2차 며느리가 죽었을 때 시어머니의 상복인데 표면적으로 막상 상복을 입을 장본인인 자의대비 조씨의 의견을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조씨는 조정 대신들과 손자 현종이 정하는 대로 입었을 뿐이다. 자신도 모르게 당쟁의 화두를 제공한 자의대비 조씨였었다.


 예송은 사상적으로 서인과 남인 사이의 예학적 전통의 차이가 내재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정국의 변동을 가져오는 등, 예 자체의 문제를 넘어서는 중요한 사건이다. 2차 예송의 경우 현실적으로는 서인 송시열 계열과 비송시열 계열, 남인세력, 왕실의 입장 등 다양한 변수가 게재되는 등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었지만, 여전히 1차 예송에서의 예학상의 문제가 논쟁의 본질을 이룬다. 이것은 곧 17세기의 경우 서인과 남인 내에서 있어온 예학적 ·학문적 특성이 현실적인 권력상의 복잡한 여러 변수에도 불구하고 예송의 전개과정에서 저류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서인은 김장생(金長生)으로부터 이어지는 예학적 전통 속에서 주자학을 절대 신봉하는 반면, 근기남인은 원시유학인 육경(六經)을 중시하면서 고학(古學)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경향성을 가졌으며, 이러한 경향성은 권력구조(權力構造)의 측면에서도 각각 신권 중심, 왕권 중심의 두 경향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16대 인조계비;자의대비

17대 효종비;인선왕후

18대 현종비;명성왕후

 

예송논쟁

 

계모 자의대비(慈懿大妃)상복입는 기간

서인 (율곡학파)

김장생(金長生)전통

신권중심

남인(퇴계학파)

원시유학인 육경(六經) 중시

고학(古學)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경향성

왕권중심

결과

기해(1659)

효종의 상()

 

1

송시열,송준길

3

윤휴(尹稶), 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서인집권

윤선도 귀양

 

갑인(1673)

효종비 인선왕후상

9개월

1

현종의 장인인 김우명(金佑明)과 그의 조카인 김석주(金錫胄)가 남인과 연결

남인집권

15년 전의 상복도 3년복으로 고치는 것으로 결정

 

  서인은 '김장생(金長生)전통'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예송 논쟁과 관련된 김장생의  이론적 성향과 주요 이론을 알려주세요.

[답변1, 김장생의 예학]

사계 김장생(金長生, 사계, 1548~1631)에서 비롯된 서인 측의 예학은 주자가례에 기본을 두고 있다. 즉 그의 예서에는 주자의 가례를 고례로서 고증하여 보완하여 체계화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그의 예학은 주자의 가례를 충실히 계승하였다. 자연히 그의 예학은 아들이자 수제자인 김집(金集, 신독재, 1574~1656)에게 계승되고 다시 송시열에게 전승되어 집권세력으로서의 서인예론의 이론적 기반이 되는데 도움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김장생이 “고금의 예설(禮)을 취하여 뜻을 찾아내고 참작하여 분명하게 해석했으므로 변례(變禮)를 당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질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장생은 예가 바로 서면 국가도 바로 서고, 예를 잃으면 국가도 혼란해진다고 여겼다. 예를 국가 치란(治亂)의 핵심으로, 예교(禮敎)를 치국(治國)의 핵심으로 본 것이다. 그가 평소 집안 후손들에게 힘주어 강조한 것도 바로 ‘박문양례(博文約禮)’였다. 즉 학문을 널리 익히고 예를 다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송시열로 이어져 훗날 효종의 상복을 둘러싼 ‘예송논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김장생이 1598년 집대성한 ‘가례집람(家禮輯覽)’은 후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김장생과 성리학>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천지 자연에 관한 과학의 문제보다는 인간의 심성과 인간이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7세기에 김장생은 퇴계와 율곡 두 선생이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를 깊이 연구하고 치열하게 논쟁하였던 4․7논쟁(四七論爭)을 통하여 발전시킨 인간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러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살아가는 태도와 절차를 문제삼은 예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이원(理氣二元)의 존재관을 기본으로 율곡의 기발리승(氣發理乘), 이통기국(理通氣局), 이기지묘(理氣之妙)의 이론과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특히 퇴계의 이발(理發)을 부정하고 오로지 기(氣)의 발용만을 승인함으로서 율곡의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에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송강(松江)이 구용'(九容)'을 이(理)로 본 것은 소당연으로서의 이(理)의 용(用)으로 보아도 무방한데, 율곡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김장생은 우주자연과 인간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도덕과 윤리를 실천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예학으로 발전시킨 분이다. 김장생은 특히 율곡 선생의 제자로서 율곡 선생의 사상과 이론을 계승 발전시켰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 선생의 학문을 배워 그 적통(嫡統)을 이어받아 예학을 정비한 한국 예학의 종장이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국가정신과 사회발전의 방향을 정립한 장본인이다.
적통이란 자기 선생과 학파의 사상과 학문의 본 뜻을 가장 잘 이해하고 전수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종장(宗匠)이란 그 학문의 가장 대표적인 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김장생의 인간사상은 17세기 이후 한국 도학자들의 전형적인 인간관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장생의 인간관은 한마디로 도학의 인간관으로서, 인간은 예(禮)와 의리(義理)를 실천해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훌륭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김장생은 양란 이후 국란을 극복하고 한국, 중국, 만주, 일본 등 1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새롭게 재편되어 가던 상황하에서 성리학과 의리학을 바탕으로 예학(禮學)을 발전시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었던 국가를 재건하고 전 세계의 평화질서를 만들어 가려한 전형적인 조선 지성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기울어져 가는 조선사회와 문화의 방향을 인의(仁義)의 인간, 인륜(人倫)과 예의(禮義)의 사회로 제시하고 그렇게 다시 재건설하고자 했다.

<김장생과 예학>

성리학이나 예학은 짐승들과 인간을 엄격히 구별한다. 짐승들과 인간이 구별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일반 짐승은 불완전한 도덕성과 윤리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나마 본능에 의해서 행하거나, 아니면 아예 도덕과 윤리가 전혀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한 도덕을 행하고 사회윤리를 지킬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와 더불어 가장 존귀한 존재라고 본다. 인간사회에서는 개개인이 서로 얽혀 상반되는 이해관계로 갈등을 빚을 수 있다. 생활공동체에서 마찰되지 않고 조화되도록 하는 일은 현대사회에서도 중요한 과제 가운데에 하나이다. 예학은 인간이 서로 자기이익에 충실하는 나머지 다른 사람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거나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태어날 때는 자기 욕심만 만족시키려는 짐승과 달리 남을 헤아리고 양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본다.
김장생은 인간이 어질고 바른 마음으로 지속적으로 예를 실천하여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지속적으로 예를 실천하면 인간이 타고난 선한 본성을 더욱 계발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전체 사회구성원이 모두 자기본성의 선함을 타인에게 베푸는 아름다운 인간사회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예는 사회적 의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예를 실천하는 삶을 통하여 자기본연의 선한 본성을 깨닫고, 자기욕구를 절제하여 타인의 욕구를 배려하는 정신을 길러나가는 도덕적의미로서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예를 행하는 삶은 자기를 성장시켜 가는 과정이 된다.
자기이익만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과 갈등을 빚어내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남을 배려하고 자기를 절제하는 인격을 기르고 사이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는 조화원리가 예이다. 그러므로 김장생은 사람들이 어질고 바른 마음으로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질고 바르게 대할 수 있도록 예를 깊이 연구하였다.

 

[참고, 송시열의 예학]

송시열과 송준길은 여러 대신들과 의논한 결과 영돈령 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연양부원군 이시백, 영중추 원두표등이 모두 “고례에는 이 경우의 복제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니 장차자 구별 없이 기년복을 입는다고 한 시왕의 제도인 『대명률(大明律)』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이조판서 송시열, 좌참찬 송준길도 “의례의 상복소에 ‘비록 승중(承重)한 아들이라도 그 아들이 죽었을 때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는 구절이 있으니 효종이 비록 왕통을 이었으나 다음 적자서열이니 이번 국상에 대왕대비가 입어야 할 복제는 1년을 넘을 수 없다”고 하면서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할 것을 동의하였고 이에 현종도 의논대로 따르라고 하였다. 승중이란 조상의 제사 받드는 중임을 이어받거나 장손으로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을 말한다. 양송이 여기에서 쓴 승중이란 전자를 뜻하며 효종은 장자가 아니므로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자의대비 복제는 삼년복이 아닌 기년복이라 한 것이다. 결국 이들의 견해는 비록 임금이라 해도 예법을 초월할 수 없으며 왕가의 특수성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질문2] 퇴계이황의 이론이 좀더 원리적인 것이 아닌가요?

[답변2, 이황의 예학에 따른 철학적 견해]

 남인의 사상적 종주인 이황(李滉, 퇴계, 1501~1570)의 사상은 이일원론으로서 그의 주리론에 따르면 군신, 부자, 부부, 장유의 질서가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인간관계의 질서, 즉 예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가부장 중심의 종법질서를 합리화 하는 것이었다. 이 종법질서는 비록 왕가라 하여도 어길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황의 이런 사상에 따르면 자의대비의 복제는 기년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효종이 비록 왕위를 이었다 하더라도 인조의 둘째 아들이라는 종법은 변할 수 없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황의 이런 사상과는 반대로 남인들은 삼년설을 주장하였는데, 이유는 그들의 철학적 견해 때문이 아니라 정권에서 소외된 야당이기 때문이다. 즉 여당인 서인에 대한 야당의 정치공세가 삼년설인 것이다.

 

[참고, 이이의 예학에 따른 철학적 견해]

서인들의 사상적 종주인 이이(李珥, 율곡, 1536~1584)의 사상에 따르면 그들이야 말로 삼년설을 주장해야 했다. 이이는 이의 절대성을 인정하면서도 기의 중요성을 함께 인식하는 상대론적 태도를 보였다. 즉 이의 절대성을 인정하지만 기의 상대성도 인정함으로써 변화의 여지를 남긴 것이고 그의 이런 이기에 대한 상대성이 현실적으로는 개혁사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상대성을 예론에 대입한다면 자의대비의 복제는 삼년설이 될 수도 있었다. 비록 장자가 우위에 있다는 종법은 변할 수 없지만 이는 때에 따라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물의 상대성을 인정한다면 자의대비의 복제도 경우의 특수성을 인정해 삼년복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인들은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해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들이 집권당이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세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는 임금 혼자가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인의 예학]

남인 측의 예학은 근기 남인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정구(鄭逑, 한강, 1543-1620)에서 비롯된다. 그의 예학 경향은 주자가례 일변도의 예학 풍에서 탈피하여 북송제유의 예설에 시야를 확대시켜 주자의 예설을 그 한 부분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이 특징으로 드러난다. 또한 왕가례의 특수성을 강조하여 주자가례가 중심이 됨으로서 생기는 형식 위주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삼례에 거슬러 올라가 예의 본원을 추구하였으니 그의 고례에 중점을 두는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는 이후 허목이나 윤휴의 육경(六經)중심의 학풍으로 이어지며 치도(治道)를 현실에 적용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예송에서 송시열이 의례 가공언소(賈公彦疏)에서 사종지설을 내세우면서도 마지막으로 신의경의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정태화에게 제시한 것은 서인 예론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에 반하여 남인의 경우는 고례에 소급하여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등에 입각하고 있다. 이러한 예론의 차이는 서인이 주자학 절대 신봉을 주장하는 반면 남인이 원시유학인 육경을 중시하면서 고학적 복고성을 보이는 학풍을 조성하고 있는데서 찾을 수 있다. 결국 예송은 서인측의 기년설에 대해 삼년설로 맞서는 남인측과의 단순한 견해 차이에서 출발한 듯 했으나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양측의 예학적인 인식의 차이가 뚜렷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론에서의 승리는 권력의 장악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예송이 치열한 양상을 띄고 진행되었던 것이다.

 

[예송농쟁]

예송의 주된 쟁점은 효종(孝宗)이 왕통을 이은 적자이면서 가통 상으로는 차자였기 때문에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여 적자로 대우할 것인지 아니면 비록 왕이지만 종법이 우선이므로 차자로 대우할 것인가에 있었다. 집권 서인 송시열은 대비의 입장을 고려하여 모자간의 의리 명분을 중시하는 기년설의 예론을 제기했던 반면, 야당인 남인 윤휴는 훗날의 정치세력의 재편을 위해 당시에는 세자인 유충한 현종의 입장을 고려하여 군신간의 의리와 명분을 우선시 하는 삼년설의 예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기해예송이 발생하자 송시열(宋時烈, 우암, 1608~1687), 송준길(宋浚吉, 동춘당, 1606~1672)등 서인은 ‘사종지설(四種之說)’과 고례(古禮)에 입각하여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였고 윤휴(尹鑴, 백호, 1617~1680)를 비롯한 남인은 삼년설(三年說)을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는데 이는 효종을 장자로 보느냐 차자로 보느냐 하는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양파, 1602~1673)의 중재 하에 장, 차자의 구분이 없는 국제에 의거한 기년설이 왕에게 건의되며, 부왕의 상을 당해 정황이 없었던 현종은 자의대비의 복제를 기년복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듬해에 3년복으로 개정할 것을 주장하는 허목(許穆, 미수, 1595~1682)의 상소로 인해 논쟁이 본격적으로 재연된다. 이때 양송과 허목의 치열한 논쟁의 와중에서 현종은 점차 3년설에 기울어지게 된다. 왕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제왕가로서의 예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허목, 남인의 예송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달에 올라온 윤선도(尹善道, 고산, 1587~1671)의 상소는 서인들이 효종과 현종의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다는 논리로 확대 해석될 수 있었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집권서인세력은 윤선도를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한다. 현종은 어쩔 수 없이 윤선도를 삼수에 위리안치 시켰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집권 서인세력과의 갈등이 심해지자 이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따라서 이후에 3년설을 주장하고 윤선도를 구원하는 상소가 간간히 이어지자, 현종은 집권 서인세력의 거듭되는 처벌 요구에도 불구하고 되도록 3년설 주장자들을 보호하고자 한다. 결국 1666년(현종 7년)복제논쟁 자체를 금지함으로서 더 이상의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선에서 1차 예송논쟁을 마무리하게 된다. 기해예송은 또한 이후 조선의 정치사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의 붕당은 상호공존의 측면하에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졌으나 기해예송이후 상호공존의 측면은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후에는 상대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당쟁이 격화되어 정국이 혼란에 빠진 것이다. 즉 예송은 조선의 붕당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