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성산 운수암과 해주오씨 집성촌 덕봉리를 찾아서
고성산 운수암과 해주오씨 집성촌 덕봉리를 찾아서
지난 유월 스무하룻날 메르스 광풍이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휩쓸고 있는 일요일, 하루 빨리 전염이 진정되기만을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빌고 있을 때, 가뭄까지 겹쳐 힘든 농민은 물론 장사해 먹고사는 중·소상인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옛날 나라에 기근과 역병이 창궐하면 모두 왕의 부덕의 소치라 여겨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하는데 과학이 발달한 21세기 대명천지에 웃기는 일이겠지만 적어도 책임은 통감해야 할 것이다. 바이러스가 온 국민을 공포로 떨게 한 원인을 살펴보면 천재지변이라기보다는 인재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안이 발생하면 즉각적이고 단호한 판단력이 요구되는 때에 무사안일에 빠진 이 정부는 일명 골든타임이란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또한,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허둥대는 모습을 보면서 국민은 불안과 불신으로 더 이상 정부에 대해 신뢰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늘은 멀리 흰 뭉게구름만 보이고 따가운 햇볕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어디 소나기라도 한 바탕 뿌려주길 바라면서 주섬주섬 배낭을 챙겨 길을 나섰다. 어린 시절 여름장마가 그치고 앞 냇가에 물이 불면 몽글몽글 자갈이 깔린 물에 들어가 한 참 멱을 감고 자갈밭에 나와 몸을 말리며 뭉개구름 지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높은 산을 마주하곤 했다.
중학교 국어 시간에 ‘산 넘어 남촌에는’ 제목의 노래를 처음 접하고 까까머리 소년의 감성을 흔들어 놓기도 했던 이 노래.
“산 넘어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 해마다 봄 바람이 남으로 오네
아 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 밀익은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것 한가진들 들려 안오리 / 남촌서 남풍 불때 나는 좋데나”
내 어린 시절의 산 넘어 남촌이 성장하여 알고 보니 바로 천덕산과 이어지는 고성산이었다.
고성산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방신리, 원곡면 칠곡리에 접해있다. 높이 298미터인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산세가 수려하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인근 오산, 용인, 평택, 안성에서 많은 등산객들이 찾아오는 사랑 받는 산이다.
고성산의 등산 코스는 크게 두 곳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산장휴게소가 있는 만세고개에서 오르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양성면 방신리 쪽에서 올라 운수암 쪽에서 오르는 방법이 있다.
운수암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2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려시대 조성한 비로자나 불상이 있다. 운수암은 조선 영조 26년에 창건된 사찰로 훗날 대원군이 중건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면서 운수암이라고 쓴 친필현판을 내려 유명해진 절이다.
고성산 정상에서 보면 정 북쪽에 삼일운동기념관이 보이고 천덕산 공군 레이더 기지가 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에는 오산 독산성과 수원 광교산까지 한눈에 들어오기도 하는데 찾아간 날은 연무가 심해 흐릿하게 형체만 알 수 있었다. 남쪽으로는 멀리 안성이 보이고 양성과 공도로 이어지는 드넓은 들판과 평택으로 뻗은 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이 번 등산은 늘 오르던 코스의 반대편에서 출발해보기로 했다. 방산리에서 운수암으로 가는 길은 마을 한 가운데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차량으로 마을 주민들이 차량 소음과 안전에 늘 신경이 곤두서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우회 도로를 내달라고 운수암 약수터에 서명용지가 있어 서명했던 기억이 난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메르스 불안을 떨치고 산을 찾은 등산객들이 북적댔다. 운수암에서 출발하여 산등성을 따라 몇 굽이 오르다보니 고성산 정상에 올랐다. 시간은 채 한 시간도 안 걸린 것 같다. 오르면서 여기 저기 풍경사진을 카메라에 담느라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산을 타기에는 좀 짧은 거리였다.
고성산 정상에서 준비해간 간식을 꺼내 먹고 잠시 쉬면서 산속 숲을 지나는 바람을 맞다보니 이 맛에 산을 오르나보다 싶었다. 주변에는 삼삼오오 그늘을 찾아 자리까지 펴놓고 휴식을 취하는 등산객도 있었다.
사실 오늘 이곳으로 오른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운수암을 돌아보고 양성면 덕봉리의 오백년 해주 오씨 집성촌을 답사하고자함이었다. 답사는 여럿이 다녀야 좋겠지만 최근에는 혼자 다니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런데 혼자 답사를 다니는 것도 그 나름대로 좋은 점이 많다. 우선 신속성과 누구의 구애도 안 받으니 호젓하고 자유롭다.
운수암은 앞에서도 소개했듯이 고종 7년(1870)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중건되고 운수암 현판을 친필로 하사하여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운수암이 자리한 곳은 일명 무양성(無陽城)이라고 불리는데 테뫼식 산성으로 고대로부터 많이 쌓아진 형태이다. 안내판에는 석성(石城)이라고 되어 있지만 육안으로는 석축으로 된 곳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삼국시대 쯤 일까 아니면 그 이전부터 일까 일상과 전쟁이 늘 상존하는 때에 북방에서 침략하거나 삼국 간에 전투가 벌어 질 때는 평소에 살던 마을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곳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그래서 산악지역이 많은 우리나라는 곳곳에 산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대표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 오산의 독산성일 것이다.
이곳 지명이 양성면인 것을 보면 ‘무양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운수암과 산성을 둘러보고 찾아간 곳이 해주오씨 집성촌인 덕봉리 마을이다. 이곳 마을 한편에는 덕봉서원이 있다.
덕봉리는 해주오씨 중시조인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정무공 오정방(1552~1625)이 이곳에 세거하면서 조선 중·후기에 많은 문·무과에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이다.
인물들을 보면 오정방(1552~1625) 오사겸(?~1628) 오숙(1592~1634)
오두인(1624~1689) 오태주(1668~1716) 오원(1700~1740) 오재순(1727~1797)
이곳 해주오씨 가문은 조선후기 노론 경화사족의 학풍을 이루던 가히 명문가라 할 수 있다.
덕봉서원은 조선 숙종때 기사환국으로 죽은 오두인(1624~1689)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창건된 해에 숙종으로 부터 사액을 받은 사액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경기유형문화재 8호(1972)로 지정되었다.
오두인은 송시열과 함께 서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의주로 유배를 가다가 파주에서 죽었으며, 그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풍계사(豊溪祠),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 양성(陽城)의 덕봉서원(德峰書院), 의성(義城)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덕봉리 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양택지로 풍수지리로 본다면 명당이라 할 수 있다. 마을 뒤로는 고성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좌·우로 마을을 감싸는 바리봉과 대이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넓은 평택평야가 펼쳐 있다. 마을 주민은 90%가 해주오씨가 살고 있다고 하니 가히 오백년 전통을 이어오는 집성촌이라 할 수 있다.
마을을 돌아보다 보니 고택과 함께 최근에 새로 건립한 재실이 있고 재실 앞으로는 백련정과 백련지가 있어 마을의 운치를 더 고풍스럽게 보이고 있다. 백련정에는 기문(記文)이 걸려 있는데 현판의 내용은 다 알 수 없으나 백련정을 세운 내력과 이곳의 풍광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라 대충 짐작할 뿐이다.
백련정 앞에는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큰 우물이 있는데 칠순은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우물물을 퍼 올려 청소를 하고 계셨다. 몇 마디 마을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니 이곳에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아주머니께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천덕산 청원사에 잠시 들려 보니 그동안 요사채로 쓰였던 건물이 헐려 있었다. 요사채가 없으니 절 앞 마당이 훤하고 대웅전과 칠층석탑이 한 눈에 들어왔다. 새로 지을 건물은 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옆으로 지을 계획인 것 같다. 저녁 무렵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 쯤 진위천이 흐르는 마산리 건든들을 달려 집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