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국역 열 분의 선조가 남긴 시문학
* 문헌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총 431페이지 중 일부만을 공개합니다.
국역 열 분의 선조들이 남긴 시문학
- 生涯를 中心으로 -
북계(北溪) 진유번(陳 有 蕃) 先生
백헌(栢軒) 진 우(陳 宇) 先生
금호(錦湖) 진 흠(陳 欽) 先生
섬호(剡湖) 진경문(陳 景 文) 先生
백곡(栢谷) 진극경(陳 克 敬) 先生
송계(松溪) 진무성(陳 武 晟) 將軍
수재(修齋) 진극일(陳 克 一) 先生
환성암(喚醒菴) 진극순(陳 克 純) 先生
낙곡(樂谷) 진익한(陳 翼 漢) 先生
기심재(旣心齋) 진의걸(陳 義 杰) 先生
예경 진 용 빈 편저
國譯 열 분의 先祖들이 남긴 詩文學
- 生涯를 中心으로 -
북계(北溪) 진유번(陳 有 蕃) 先生
백헌(栢軒) 진 우(陳 宇) 先生
금호(錦湖) 진 흠(陳 欽) 先生
섬호(剡湖) 진경문(陳 景 文) 先生
백곡(栢谷) 진극경(陳 克 敬) 先生
송계(松溪) 진무성(陳 武 晟) 將軍
수재(修齋) 진극일(陳 克 一) 先生
환성암(喚醒菴) 진극순(陳 克 純) 先生
낙곡(樂谷) 진익한(陳 翼 漢) 先生
기심재(旣心齋) 진의걸(陳 義 杰) 先生
禮敬 陳 庸 彬 編著
머 리 글
옛 문헌(文獻)들 속에 흩어져 전해오는, 매호 진화(陳澕)선생의 유고(遺稿: 남긴 글)를 새롭게 수집(蒐輯: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 모아서 편집)하여, 두 번째로 출간(出刊)된 책을 “매호 유고 (梅湖 遺稿)” 중간본(重刊本)이라고 한다. 이 중간본은 조선조 제25대 철종(哲宗)5년 서기1854년에, 매호선생의 후손(後孫)인 진 호(陳 澔)와 진 기 환(陳箕煥)님이 합심하여, 매호선생의 유고집을 엮어서 발간(發刊)하였다.
또한 이들은 매호선생의 후예(後裔)중에서 명성(名聲)이 있는 12분의 현인(賢人)을 선정(選定)하여, 그들의 행적(行蹟: 평생에 한일)과 시문(詩文)을 수집하고, 가려뽑아서 중간본(重刊本) 부록으로 실었다. 이들 중에서 두 분은 갈명(碣銘: 비석에 새긴 글)만 전하고 있다. 갈명만 전하는 두 분은, 본서(本書: 이 책)의 취지(趣旨)에 부합(符合)되지 않기 때문에 제외(除外)하였다. 다만 열 분의 발자취와 그들의 시문(詩文)을 번역하였다. 이분들이 남겨 놓은 시(詩)는 총 141수(首)이다.
매호선생의 중간본이 150년 전에 출간(出刊)된 이후, 장서각(藏書閣)에 보관되어 오는 가운데, 극히 소수의 관련 전문 학자만이 열람(閱覽)하여 읽어 왔을 뿐이다. 한글세대(世代)로서는 어려운 한자(漢字)로만 엮어진 중간본(重刊本)을 접근(接近)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제까지 150년 동안이나, 무거운 침묵에 싸여 사장(死藏:hoarding, 시문을 유용하게 쓰지 않고 묵혀둠)된 채 감추어진 그 보석의 빛을 세상에 비추지 못하였다. 이처럼 오랫동안 베일(Veil)에 싸인 어두운 껍질을 말끔히 벗어 버리고, 이제 밝고 투명한 한글의 옷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한글세대에게 다가가서 숨겨진 진리와 삶의 지혜를 안겨주게 되었다.
북계(北溪) 선생
정도(正道)를 벗어난 수단으로 권력을 쥔 수양대군
그의 즉위(卽位)를 부정(否定)하던 곧은 선비들이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다.
극형(極刑)을 당한 사육신(死六臣)
그들과 인척(姻戚)에다
그들과 뜻이 같다는 이유로
사약(死藥)을 받은 북계(北溪)선생.
백헌(栢軒) 선생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던 백헌 선생
조선 팔도의 재사(才士)들이 모인 태학
바른 덕행과 뛰어난 재질(才質)은
백헌(栢軒)이 장의(掌議)로 뽑히는데 손색이 없었다.
그는 또래의 재사들과 학문을 익히고 연구하는 가운데
그들의 존경(尊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장의로서 가르침을 주는 위치에 우뚝 섰다.
당시에 권력을 휘어잡은 김안로(金安老)는
어진선비들을 모함(謀陷)하고 그들의 목을 베었다.
중종(中宗)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나라를 제 멋대로 뒤 흔들던 김안로의 무리들
이들의 그릇됨을 그냥 넘기지 않고
단호히 태학의 선비들에게 폭로하였던, 백헌 선생
이에 격분한 김안로는
간신(奸臣)의 성난 음모(陰謀)로 바뀌어
무거운 허물을 꾸며
백헌을 죄인으로 몰아세웠다.
간사한 음모의 속삭임에
귀가 얇은 당나귀 귀는
사약(死藥)을 내렸다.
중종(中宗)의 사약을 받고
의연(毅然)히 떠나가신 백헌(栢軒)선생.
금호(錦湖)선생
약관으로 사마시(司馬試: 초시 무과)에 합격한 후(後)
현감(縣監)에 올라 공무(公務)를 맡았다.
성품(性品)이 어질고 부드러우면서도
공(公)과 사(私)를 엄격히 가르는
깨끗하고 공정한 관리(官吏)이었다.
부모님의 병환이 깊어지면서
치료와 간호가 그의 손길을 기다렸다.
효도를 하자니 공무(公務)가 소홀하고
공무(公務)에 충실하자니 불효가 되었다.
효성을 바치고자 벼슬을 버렸다.
공익(公益)에 손실을 덜고자 사직(辭職)을 하였다.
이처럼 말과 행동이 일치(一致)하였다.
후세(後世) 유생들은 금호선생을
현인(賢人)으로 높이 받들고 있다.
섬호(剡湖)선생
초시(初試)에 급제하고
청운의 꿈을 안고 대과(大科)를 준비하던 중
바다 건너 왜구(倭寇)들이 물밀 듯이 처 들어왔다.
이른바 임진왜란 이었다.
조국을 지키는 일에 뛰어들어
왜구와 싸우기 장장 7년
적이 물러간 뒤에
깊은 상처(傷處)로 얼룩 진 조국(祖國)
힘을 모아 국력(國力)을 키우려는 의지(意志) 대신
권력(權力) 싸움만 일삼는 벼슬아치들이 자욱하였다.
썩은 관료(官僚)사회(社會)에 분노를 느꼈다.
과거(科擧)를 포기하고 초야(草野)에 묻혀
후학(後學)들을 가르쳤다.
조정에서 이조(李朝)정랑이란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사양했던 곧은 섬호(剡湖)선생.
백곡(栢谷)선생
청백리(淸白吏)로 이어온 명문가(名門 家)
지조(志操)를 목숨보다 귀하게 지켜온 선조들
곧은 가문(家門)의 후예(後裔)로 태어난 백곡
기묘(己卯), 을미(乙未) 두 사화(士禍)는
이 가문을 모진 풍파(風波)로 휩쓸었다.
집안의 기둥들, 가까운 혈족(血族)들까지
모조리 형장(刑場)에 이슬로 사라졌다.
가문(家門)의 비극(悲劇)을 보며 자란 백곡
썩은 정치(政治)판을 질시(疾視: 밉게 봄)하고
벼슬에 대한 뜻을 접었다.
성리학(性理學)에 심취(心醉)되어
깨끗한 삶을 살다 가신
온화한 선비 백곡(栢谷)선생.
송계(松溪) 장군
남해에 몰려온 왜적의 배 무리를 향해
과거(科擧)에 급제하고자 글공부와 무예(武藝) 익히기에
묻혀있던 청년 진무성(陳武晟), 조국의 위기를 맞아
청운의 꿈을 잠시 접고, 백의(白衣)로 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 휘하에 비장(裨將)이 되었다.
평소 갈고 닦은 기량으로 적장의 이마를 꿰뚫은
그의 화살촉은 승리의 무게로 실어갔다.
당포 싸움, 소포해전에서 그러했고
숱하게 떠있는 적선(賊船)들을 향해 불덩이를 쏘아
왜적을 태워버린 송계장군의 화공전법(火攻戰法)은
한산도 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낸,
그대의 수훈(殊勳: 뛰어난 공훈)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힐 수 없는
영원한 승리의 화신(火神)으로
길이길이 빛나리라.
송계 진무성 장군의 그 불같은 충혼(忠魂).
수재(修齋)선생
부모님 뜻을 받드는 지극한 효자 이었다.
글공부 못지않게
무기(武技: 무술)를 익힘에도 열중 하였다.
을과(乙科:과거)에 급제(及第)한 뒤
벼슬길에 나갔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
한때 관직(官職:벼슬)을 버렸다.
고향에 은거(隱居)하면서
경전(經典)과 병서(兵書)를 탐독했다.
이 때 고을사람들은
수재를 문무(文武) 거사(居士)라 불렀다.
얼마 후 다시 현감(縣監)으로 등용되어
어질고 공정(公正)한 관리가 되었다.
청나라가 국경을 침범한
이른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엔
관군을 통솔하는 중흥장(中興將)이 되었다.
평소 닦고 기른 무예(武藝)로
무장(武將)의 실력을 발휘하신 수재(修齋)선생.
환성암(喚醒菴) 선생
젊은 환성암은
역서(曆書), 천문학(天文學)에 관심이 컸다.
또한
역서(易書)에도 흥미와 조예가 깊었다.
명예와 부귀(富貴)에 욕심이 없이
나물 먹고 거친 옷을 걸쳐도
신의(信義)를 잘 지켰다.
이처럼 타고난 도인(道人)으로 산 환성암(喚醒菴).
낙곡(樂谷)선생
겨우 6세의 어린 나이에
한시(漢詩)를 지어
귀염을 토(吐)한 신동(神童) 이었다.
주변의 선망을 받으며
약관(弱冠)의 나이에 과거급제로
젊은 관료(官僚)가 된 낙곡
경서(經書)에 정통한 낙곡을
관각(館閣)에서는 살아있는 주서(注書:사전)라고 불렀다.
학문을 두루 익혀
학식이 해박(該博)했다.
시문에도 각체(各體)를 능히 익혀
절구(絶句)에다 율시(律詩)까지
시형(詩形)을 골고루 시를 읊어
119수(首)란 한시(漢詩)를 남겼다.
낙곡선생이 어느 해에
강원도 월정사(月精寺)에 이르러
우사간(右司諫) 매호 진화 선조(先祖)의 글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월정사(月精寺)
선조께서 어느 해에 오대산에 이르셨던가,
푸른 산은 말이 없고 저문 구름만이 낮더라.
남기신 시편(詩篇)을 선루 향해 걸어 놓고서
고개 돌려 산들을 바라보니 마음 둘 데 없더라.
지난해에 가장 높은 누대에 올랐더니,
사방(四方)의 높은 산들이 눈 아래 낮아 보이더라.
우연히 동구에 들어갔다가 말고삐를 되돌리니,
유랑이 재차 아득한 길에 이른 것만 아니더라.
기심재(旣心齋) 선생
뜻을 돈독(敦篤)히 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성리학(性理學)을 탐독하여
천지(天地) 역수(曆數)에 통달했다.
성리학에 심취하여
도의(道義)를 강의(講義)하고
그를 몸소 실행(實行)하며
욕심 없이 살다 가신 선비 이었다.
서기 2002년 10월 27일
예경 진 용 빈 씀
일러두기
이 책은 고전(古典)자료를 선별하고, 해석한 후에 구성(構成)되었다. 이처럼 어려운 한자(漢字)로 되어있는 문장을 쉽게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자(漢字) 하나하나에 음(音)과 훈(訓)을 붙였기 때문에, 누구나 부담 없이 접근(接近)하여 읽을 수 있다.
열 분 선조(先祖)들의 발자취와 그분들이 남긴 시(poetry)를 한글로 풀어 펼쳐 놓았다. 이어서 한자로 된 문장을 번역하여, 아래 보기와 같이 “번역된 내용을 펼쳐놓고, 이어서 (원문)인 한자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원문의 한자는 ,1). ,2). 3).와 같이 .그 위치를 표시하여, “각주”난에 한자의 음과 뜻을 풀어놓았다.
(보기:example)
"공의 이름은 유번 이요.
북계는 그분의 아호이다.”
(원문) :공휘유번(公諱 有蕃)
북계기호야(北溪其號也)’1)
시문(詩文)은 아래 보기처럼 “번역된 시문을 펼쳐놓고, (원문)을 표에 넣어 1구.2구.3구.4구 차례로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가로쓰기를 하였다.
(보기:example)
3-1. 제(題): 비 온 뒤에 봄을 읊다
(1구).저문 날 서루가 고요하다
(2구).봄 동산에 비가 온 뒤라서
(원문).3-1.
구분 |
1) |
2) |
3) |
4) |
5) |
1구
|
向향할향 |
晩늦을만 |
書글서 |
樓다락루 |
靜고요정 |
2구
|
春봄춘 |
山뫼산 |
雨비후 |
後뒤후 |
時때시 |
머리말
일러두기
목 차(目次)
1. 북계 (北溪) 진유번 (陳有蕃)............................11
2. 백헌 (栢軒) 진 우 (陳 宇).............................17
3. 금호 (錦湖) 진 흠 (陳 欽).............................43
4. 섬호 (剡湖) 진경문 (陳景文).............................53
5. 백곡 (栢谷) 진극경 (陳克敬).............................65
6. 송계 (松溪) 진무성 (陳武晟).............................73
7. 수재 (修齋) 진극일 (陳克一).............................82
8. 환성암 (喚醒菴) 진극순 (陳克純)............................99
9. 낙곡 (樂谷) 진익환 (陳翼漢)............................117
10. 기심재 (旣心齋) 진의걸 (陳義杰)............................243
후발(後跋)
부록(附錄)
1. 북계(北溪) 선생
때는 조선조 제3대 태종(太宗) 5년 을유(乙酉) 서기1405년에, 북계(北溪)선생이 태어 나셨다. 선생의 성함은 진유번(陳有蕃)이요. 자(字)는 자번(子蕃)이고, 북계 는 그의 호(號)이다. 관향(貫鄕)은 여양(驪陽: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이다.
그의 선조(先祖)는, 우리나라 고전문학의 꽃인 한림별곡(翰林別曲) 제1장에서 당대를 풍미(風味: elegance. 됨됨이 멋스럽고 아름다움)하던 뛰어난 시인(詩人)으로 찬양(praise)되어 기술(記述)된 매호(梅湖)선생이다. 매호 선생은 고려 중엽에 우사간(右司諫)을 지낸 진화(陳澕)선생이고, 북계는 그의 6세(世) 후손(後孫)이다.
판전농시사(判典農侍事)란 벼슬을 지낸, 진적(陳的) 공(公)이 북계(北溪)의 아버지이다. 북계선생의 성품(性稟)이 엄정(嚴正)하고 굳세며 행의(行義 ; 의로운 행동)가 이미 간결(簡潔 ; 간단하고 깔끔함) 하였다.
(원문) 공휘유번(公諱有蕃)
자자번(字子蕃)
북계기호야(北溪其號也)
계출여양(系出驪陽)
매호 지육세손야
(梅湖 之六世孫也)
판전 농시 사 적생
(判典 農侍 事 的生)
공성엄의 행기상간
(公性嚴毅 行己尙簡)1)
북계선생의 가문(家門)은 대대로 선조들이 벼슬을 하여 나라에 공(功 ; 공로)을
세웠다. 그러한 연유(緣由)로, 즉 가문의 공훈(功勳)으로 선생은 벼슬이 태안군수
(泰安郡守 ; 종4품)에 이르렀다. 군수로 있으며 정사(政事 ; 군수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보살 피는 일.)를 수행(遂行)할 때 청렴하고 간결(簡潔 ; 간단하고 분명하며 깔끔함)함을 숭상(崇尙 ; 높이어 소중하게 여김)하여, 조금도 법(法)을 어기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선생은 군수로서 임무를 마치고 그곳을 떠난 후에도 백성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생각을 갖고 있었다. 역시 그 곳의 백성들도 선생이 군수로 있으며 백성들에게 베풀었던 선정(善政 ; 깨끗하고 바른 관청의 행정)은 오랫동안 그들의 가슴 깊이 짙은 감명(感銘 ; 마음에 새겨져 잊을 수 없을 만큼 깊은 느낌을 받음)으로 새겨졌다.
(원문) 이문공사지 태안군수
(以門功仕至 泰安郡守)
정상청간 (政尙淸簡)
불범추호(不犯秋毫)
민유거후사(民有去後思)2)
한편 당시 조정에서는 왕권(王權)을 장학하기 위하여, 어린 조카인 단종을 권좌
에서 몰아내고 사약(死藥)을 내리기 까지 수양대군의 쿠테타를 살펴보기로 한다. 집현전(集賢殿) 학자들의 정치적 발언이 커짐에 따라 정치의 실권이 그들에 의하
여 좌우되는 느낌을 받은 수양대군은 반발의 싹을 틔우게 되었다. 왕족의 대표로
어린 단종(端宗)을 보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기에 견제하는 세력을 꺾기 위하여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희등 측근들과 합세하여, 정계(政界)의 원로(元老)인 김종서
를 그의 집에서 죽이고,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을 차례로
제거하였다. 그리고 이들과 친근한 자기 아우인 안평대군 까지 죽였다. 왕위(王位)를 탈취한 수양대군은, 지조(志操 ; constancy)를 지키고 부당한 권력 승계에 반대하던, 곧은 선비들은 닥치는 대로 목을 베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이 즉위(卽位 ; 왕위에 오르다)하니, 이가 곧 조선 제7대 임금인
세조(世祖)이다. 이때가 바로 서기 1455년이다. 세조(世祖)가 부당한 권력으로 왕
위(王位)에 오른 것을 부정(不定 ; denial, 그렇지 않다고 인정함)하고, 왕위계승에 정통
성을 귀하게 여기어 지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어린 단종의 복위(復位 ; 물러났던 임금이 다시 그 자리에 오름)를 꾀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수양대군은 이들을 모조리 극형(極刑; 더 할 수 없이 무거운 형별)에 처하니, 이들이 곧 사육신(死六臣)*
이다. 매죽당(梅竹堂) 성삼문(成三門)도 사육신의 한 분이다. 이처럼 세조 의
미움을 받던 성삼문과 외종(外從 ; 외종사촌의 준말. 외삼촌의 아들이나 딸)간 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어 북계(北溪)선생은 멀고 외진 평안북도(平安北道) 벽동(碧潼)으로
귀양 갔다. 그곳에서 병자년(丙子年) 서기 1456년에 북게선생은 51세의 짧은 나이로 죽음을 당하였다.
(원문) :안차사 (按此詞)
즉경태병자
(卽景泰丙子)
세조온 매죽당 성삼문
(世祖慍 梅竹堂 成三門)
공이 외종 연좌
(公以 外從 連坐)
적 벽동 사사
(謫 碧潼 賜死)3)
지금으로부터 546년 전이다. 그때 평안북도라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각으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사람이 살아가기에 힘들고 불편한 외진 곳이다.
지형적(地形的)으로 하늘을 향해 치솟은 높고 험준한 산줄기가 첩첩이 이어진 곳에, 좁고 깊은 골짜기로 이어져 촌락이 형성되기 조차 어려운 곳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식주(衣食住) 마저 구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통행하기 위해 다듬어진 길도 없이 산길을 따라 산을 넘고 넘어야 되는 깊은 산골이었다. 이러한 곳에 귀양 간 북계(北溪)선생에게는 언제 세조(世祖)가 내리는 사약(死藥)이 당도(當到:arrival)하여 죽음을 재촉할지 모르는 암담(暗澹)한 처지 이었다.
그러나 북계선생은 주어진 처치를 담담히(placid) 대처하고, 「자신의 만사(挽詞 :슬퍼하는 글)」라는 주제의 글은 이때 지은 것이다. 만사(挽詞)는 다음에서 소개하겠다. 북계선생은 순절(殉節:충신이 충절을 위해 죽음)하였기 때문에 사육신(死六臣)이 신원(伸寃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되었을 때에, 명예(名譽)가 회복되고 북계 선생께서도 이조참판(吏曹參判 ; 종2품)이 증직(贈職: 벼슬을 줌)되었다. 그리고 영월(寧越)의 장릉조사단(莊陵朝士壇)에 종향(從享 ; 모시어 제사를 지냄)되어있다.
(원문) 공인순절야 (公因殉節也)
태육신신원 (태 六臣伸寃)
공역몽증
(公亦蒙贈)
이조참판
( 吏曹參判)
종향우영월 장릉 조사단
(從享于寧越 莊陵 朝士壇)1)
북계(北溪)선생께서 남긴 시문(詩文)은 아쉽게도 두 편밖에 전하지 않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한편은 온전하지 못하다. 후세(後世)에 보관이 부실한 탓으로, 오언절구(五言絶句)로 2수(二首)이었는데, 각수마다 말구(末句 ; 문장의 끝 부분)를 쥐가 갉아 먹은 까닭에 2구(二句)만 실어 전한다.
이 시(poetry) 옆에 ‘검화당(儉和堂)의 자서(自敘 ; 자기 일을 자기 스스로 펼쳐 씀)에 공(公:북계)이 두어칸 초가집을 지었다. 이어 검화당(儉和堂)이라는 당호(堂號: 집의 이름)를 내걸고 이곳에서 평생 동안 살았다.’ 탐욕(貪慾)이 없이 깨끗한 선비의 지조(志操)를 지키며, 맑은 신선(神仙)처럼 생(生)의 여유를 즐겼다.
(원문) 공구초옥수간 (公構草屋數間)
잉서호왈 (仍暑號曰)
검화당(儉和堂)
이소식어 평생(而消息於 平生)’2)
1-1. 오언절구(五言絶句)’3)
(1구). 검소함을 숭상하니 여유가 작작(;넉넉함)하고
(2구). 온화함을 위주로 하자 마음이 안정되네.
(원문) 1-1.
|
① |
② |
③ |
④ |
⑤ |
1구
|
尙 숭상할상 |
儉 검소할검 |
儘 다할진 |
裕 넉넉할유 |
綽 너그러울작 |
2구
|
主 주인주 |
和 화목할화 |
乃 이에내 |
靜 고요할정 |
安 편안할안 |
멀리 평안북도로 귀양간 북계(北溪)선생은 그곳 적소(適所 ; 귀양살이 하는 곳)에서
죽음을 당하기 직전에 자신의 만사(挽詞: 애도하는 글)를 읊었다.
1-2. 제(題): 자신의 만사(挽詞)’4)
(1구). 충성과 신뢰를 위주로 하고 욕심을 줄여야 하거늘
(2구).평생 동안 해 온 나의 공부가 부끄럽구나.
(3구). 저 육신에 연좌되어 벌을 받았거늘
(4구). 그들과 더불어 기꺼이 함께 가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5구). 남쪽으로 가는 나를 아는 이가 없으니
(6구). 운명인 것을 슬퍼한들 어찌할 수 있겠는가.
(원문) 1-2. 자신의 만사
|
① |
② |
③ |
④ |
⑤ |
⑥ |
⑦ |
⑧ |
1구
|
主 주인주 |
忠 충성충 |
信 믿을신 |
而 말이을이 |
寡 적을과 |
欲 하고자할욕 |
兮 어조사혜 |
/ |
2구
|
愧 부끄러워할괴 |
一 한일 |
生 날생 |
之 갈지 |
工 일공 |
夫 사내부 |
/ |
/ |
3구
|
彼 저쪽피 |
六 여섯육 |
臣 신하신 |
之 갈지 |
連 이을연 |
坐 앉을좌 |
兮 어조사혜 |
|
4구
|
恨 뉘우칠한 |
不 아니불 |
與 더불여 |
甘 달감 |
心 마음심 |
而 말이을이 |
同 한가지동 |
歸 돌아갈귀 |
5구
|
獨 홀로독 |
南 남녘남 |
行 다닐행 |
而 말이을이 |
莫 없을막 |
我 나아 |
知 알지 |
兮 어조사혜 |
6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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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 운수명 |
矣 어조사의 |
夫 사내부 |
何 어찌하 |
嗟 탄식할차 |
及 미칠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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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주장과 바른 일을 행하고서도 뜻이 다른 정적(政敵)으로부터, 부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군주에게 원망하지 않고 자기의 충성심(忠誠心)이 얇았다고 자책(自責)하는 의로운 곧은 선비 정신이 엿보인다.
2. 백헌(栢軒) 선생
폭정(暴政:tyranny,포악한 독재정치)을 피하여 서울을 떠나온 부모님의 의도에 따라 백헌 선생은 시골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선생의 이름은 진우(陳宇)이며, 자(字)는 곽이(廓而)이요. 백헌(栢軒)은 그의 호(號)이다. 관향(貫鄕 ; 시조의 고향)은 여양(驪陽)이며, 매호(梅湖)선생의 9세 후손이다. 백헌 선생의 아버지는 진사(進士)를 엮임하신 진복명(陳福命)이다. 그는 조선조 제10대 연산군(燕山君.1494-1506)의 정치가 문란(紊亂 ; 도덕이나 질서가 어지러움)해짐에 따라서 한양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갔다. 전라북도 만경(萬頃)에 살면서 스스로 호(號)를 만포자(晩圃子)라 지었다. 종적(蹤迹 ; 드러난 모양과 자취)을 해변에 감추고 시(poetry)를 읊조리며 삶을 즐겼다.
(원문) 공휘우(公諱宇) 자곽이(字廓而)
백헌기호야(栢軒其號也)
계출여양(系出驪陽)
매호지구세손야(梅湖之九世孫也)
고휘복명진사(考諱福命進士)
연산정황(燕山政荒) 거경하향시(去京下鄕始)
거만경(居萬頃) 자호만포자(自號晩圃子)
둔적해빈(遯跡海濱)
음영자오(吟詠自娛)5)
백헌(栢軒) 공(公)은 그의 나이 15세때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선생의 가르침으로 글공부를 시작하였다. 모재 선생께서는 백헌은 큰 인물로 기대(期待 ; 어느 때로 기약하여 이루어지기 바람)되기 때문에 ‘이 사람의 학문과 덕행은 그와 견줄 사람을 찾기 어렵다.’ 라고, 그의(백헌) 뛰어난 재주와 곧고 바른 마음을 높이 평가했다
비범(非凡: 보통이 아님)한 재질을 갖춘 백헌 공(公)은 열심히 학문을 익히어, 조선조 제11대 중종(中宗) 갑오(甲午) 서기 1534년에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壯元 ; 으뜸)으로 급제하였다. 이어서 그는 서기 1535년에 태학(太學: 성균관)에 들어갔다
조선 팔도에서 선별되어 태학에 들어온 재사(才士)들은 장차 나라에 큰일을 맡을 유생인 동시에 태학의 재학생(在學生)이 된다. 이러한 재학생(在學生)들 중에서, 학문이 남달리 뛰어나고 덕행이 바르기가 으뜸가는 사람을 뽑아서 장의(掌議: 성균관, 향교의 유생 중에서 뽑힌 임원들이 있다. 그 중에 으뜸자리)로 삼는다.
이때 장의는 태학의 동재 서재의 재학생들이 스스로 골라서 선출하여 제회(諸會)를 주재하도록 한다. 백헌(栢軒)선생께서는 영광스럽게도, 같은 또래의 젊은 재사(才士)들이 선망(羨望:envy,부러워하는 것)하고 존경하는 장의(掌議)에 뽑히어,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위치에 우뚝 서게 되었다.
(원문) 십오수업(十五受業)
어모재 김선생 (於慕齋 金先生)
안국지문(安國之門)
선생 대기지왈(先生 大器之曰)
사인문행한견(斯人文行罕見)
중묘갑오진사장원(中廟甲午進士壯元)
을미입태학위장의(乙未入太學爲掌議)’1)
당시(當時)에 이름난 선비들이었던, 부제학(정3품) 민기문(閔起文), 도헌(都憲) 이준민(李俊民), 이조판서(정2품) 박계현(朴啓賢), 진사 이제윤(李悌胤)등이 모두 같은 또래의 나이로 태학(太學: 성균관)에서, 백헌 공(公)이 학문이 남달리 뛰어나 장의(掌議)로 있었기 때문에, 그(백헌)를 스승으로 모셨다.
백헌(栢軒)선생께서 어느 날 태학생(太學生)들과 학문을 강론(講論: 학술이나 도의의 뜻을 풀이하고 토론함)하며, 말씀 하시기를 ‘형제 처자가 화락(和樂: 화평하고 즐거움)한 연후에 부모님이 화순(和順: 온화하고 순탕함)할 것이며, 군자(君子)가 진출하고 소인(小人)이 물러간 연후(然後)에 조정이 존중받게 된다.’ 라고 하였다.
(원문) 당명승(當名勝)
민부학 기문(閔副學 起文)
이도헌 준민(李都憲 俊民)
박이판 계현(朴吏判 啓賢)
이진사제윤(李進士 悌胤)
구이동년종사지공
(俱以同年宗師之公)
일여제생강학(日與諸生講學)
왈화형제(曰和兄弟)
락처노 연후(樂妻努 然後)
부모순의(父母順矣)
진군자퇴소인연후
(進君子退小人然後)
조정존의(朝廷尊矣)’2)
이때에 김안로(金安老)가 정권(正權)을 마음대로 휘둘러 어진 이를 모함하여 해(害)치고, 나라를 그릇되게 하고 있었다. 백헌 공(公)은, 김안로가 권력을 남용(濫用:abuse,일정한 기준이나 한도를 넘어서 마구 씀)하여 옳치 못한 행동을 일삼는데 대해서 분개(憤慨: 매우 분하게 여김)한 마음으로 장차(將次 ; 앞으로) 상소(上疏: 임금에게 올리는 글)를 올리려 함에, 김안로도 그것을 두려워하고 꺼려서 그의 아들을, 백헌(栢軒) 공(公)에게 보내어 서로 교유(交遊 ; 서로 사귀어 놀거나 왕래함) 하기를 청했으나, 백헌 공(公)이 허락(許諾: 청하고 바라는 바를 들어줌)하지 않았다.
드디어 김안로가 몸소 찾아와서 허용(許容)을 구했으나, 백헌 공(公)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김안로가 물러간 뒤에 그가 앉았던 자리를 불태우고, 그 마루를 씻어 내어 더럽힘을 당한 것처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크게 미워하는 사이가 되었다.
(원문): 시 김안로 용사해현 오국
(時 金安老 用事害賢 誤國)
공개 연장 유소거(公慨 然將 有疏擧)
안로외탄지 견자 청종유(安老畏憚之)
견자 청종유(遣子 請從遊)
공 불허 안로 궁조 구용
(公 不許 安老 躬造 求容)
공불위뇨(公不爲撓)
급안로출분 기석척
(及安老出焚 其蓆滌)
기헌 약장 매언(其軒 若將 浼焉)
유시대오 안로함(由是大忤 安老闞)’3)
백헌(栢軒) 공(公)이 고향에 가는 것을 미리 알고서, 김안로(金安老)가 그의 심복인(心腹人 ; 마음으로 무조건하고 복종하는 부하)을 사주(使嗾 ; 남을 부추겨 나쁜 일을 시킴)하여, 백헌 공을 헐뜯는 내용으로 글을 지어서 길거리에 내걸었다. 그처럼 거짓으로 꾸민 허물이 고스란히 백헌에게 돌아가도록 꾸몄다.
또한, 김안로는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과 함께, 백헌 공에게 죄(罪)를 덮어씌우기 위한 거짓 증거(證據)를 가증(可憎 ; 괘씸하고 얄밉게)스럽게 꾸미어 놓았다.
이는 역시 백헌 공에게 큰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한 음모(陰謀 ; 남이 모르게 일을 꾸미는 일)이었다. 김안로의 이러한 음모(陰謀:plot)에 의하여, 백헌 공은 졸지에 죄인(罪人)의 허물을 쓰고 왕(王)에게 심문을 받게 되었다. 왕이 친(親:직접)히 국문(鞠問 ; 무거운 죄인을 국청에게 심문하다)하니, 뭇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추호(秋毫 ; 매우 적음)의 잘못도 없는 결백(潔白: 마음이나 행실이 바르고 허물이 없음)한 백헌(栢軒) 공은 차분한 자세로, 이미 길거리에 나붙어 있던 글의 내용이 허탕(虛蕩:속이 비어 있는 거짓)한 것이며, 망령(妄靈 ; 말과 행동이 정상에서 벗어남)됨을 차분히 아뢰었다.
(원문) 공지귀향(公之歸鄕)
주기가인(嗾其家人)
암조 비방지언게暗造 誹謗之言偈)
우통구이귀지어공(于通衢而歸之於公)
우사기당여증성지(又使其黨與證成之)
상친국군정위구이
(上親鞫群情危懼而)
공주대종용기하게서지
(公奏對從容旣下揭書之)
탄망인언(誕妄因言)’1)
이어서 김안로(金安老)의 죄악(罪惡)을 낱낱이 지적하였으니, 충성(忠誠)스러운 마음과 의로운 담력(膽力:겁이 없고 용감스러운 기운)으로 말이 곧았다.
그러나 김안로에게 편파(偏頗:공평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침)적으로 기울어진 임금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왕(king)이 진노(震怒: 존엄한 사람이 성냄)하여, 살점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무거운 형벌(刑罰: 법에 정하는 대로 이익을 빼앗음)을 주어 끝내 극형(戟形 ; 더할 수 없이 무거운 형벌)에 처(處)하였다.
백헌 선생은 이처럼 형(刑)을 받아 숨이 끊어지기 직전(直前)까지 강직하고 의연한 선비의 모습을 잃지 않고, 최후로 칠언절구의 한시(漢詩) 한 수를 읊었다.
또한 태학에서 백헌선생의 지도를 받으면서, 선생을 존경하고 따르던 태학생(太學生) 200여명도 모두 같은 누명을 쓰고 멀리 귀양 갔다. 그 뒤에 왕(王)이 백헌선생이 형장(刑場)에서 읊은 시(poetry)를 보고서 깨닫고 머뭇거린 것은 몇 년이 지난 뒤이었다.
(원문) 안로 지 죄악(安老 之 罪惡)
충간 의담 (忠肝 義膽)
언사절식 言辭切直)
천위진첩가(天威震疊加)
이중형육미골단(以重刑肉穈骨斷)
내헌시왈(乃獻詩曰)
잉위운 절 태학생 이백인
(仍爲殞 絶 太學生 二百人)
병원찬(並遠竄)
상람시감오지회 수년 정유
(上覽詩感悟遲回 數年 丁酉)’2)
정유(丁酉) 서기1537년에 백헌(栢軒)선생의 동생인 진식(陳寔)이 약관(弱冠: 나이 19세)의 나이로 형의 원통(寃痛 ; 분하고 억울함)함을 상소(上疏 ; 임금에게 글을 올림)하여 드디어 형의 억울함을 덜게 하였다.
그런 연후에 왕(王)은 백헌 선생에게 집의(執義: 종3품) 벼슬을 추증(追增: 추가로 주다)하였다. 또 이어서 대사헌(大司憲: 정2품)의 벼슬을 더하여 추증(追增) 하였다.
형(兄)의 명예회복(名譽回復)을 위하여 어린 나이에, 군주(君主: King)에게 상소문(上疏文)을 올린, 백헌 선생의 아우이신, 진식(陳寔)도 뒷날 과거(科擧)를 거쳐서 부제학(副提學:정3품)의 벼슬을 지냈다.
한편, 김안로(金安老)는 직책(職責: 직분상의 책임)이 깎이고, 무고(誣告: 없는 죄를 있는 것처럼 꾸며서 관청에 고발하는 것)하고, 위증(僞證: 증인이 일부러 거짓으로 진술하는 것)한 모든 무리는 영원히 폐하여 펼 수 없게 하였다.
또한 귀양 갔던 200여명의 태학생(太學生)들은 모두 사면(赦免: 죄를 용서하여 감해줌)되어 조정에 돌아왔다.
(원문) 공지제부학(公之弟副學)
공식이약관상서(公寔以弱冠上書)
오원수 위신설
(嗚寃遂 爲伸雪)
증집의 가증대사헌
(執義 加贈大司憲)
삭안로 직(削安老 職)
제무증자(諸誣證者)
영폐불서(永廢不叙)
태학생 개사환국
(太學生 皆賜環國)’3)
그때에 비로소 조정(朝廷)이 크게 진정(鎭靜: 시끄럽고 요란하던 것이 가라 앉아 고요하게 되는 것)되고 잘 다스려졌다.
아! 공(公: 백헌)이 어려서는 가정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서는 태학(太學)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닦은 것이 오직 충성과 옳은 일 뿐이다. 그로서 어버이를 섬기는데 힘을 다하고, 또한 임금을 섬기는데 목숨을 다하여 바람, 서리, 번개 같은 고난(苦難)에도 좌절(挫折: 마음과 기운이 꺾임)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충성스럽게 길러온 본심(本心)이 없었다면 능히 할 수 있었겠는가?
(원문) :시자대정(時自大定)
오호공자유이훈적어가정
(嗚呼公自幼而訓迪於家庭)
장이강마어상서자
(長而講劘於庠序者)
유충여효이기(惟忠與孝而己)
이지사친이진기력
(以之事親而盡其力)
이지사군이진기명
(以之事君而盡其命)
풍상진정(風霜震霆)
불위좌절(不爲挫折)
차무충양지(此無忠養之)
소이능지지호(素而能之之乎)’4)
김안로(金安老)가 권력을 남용(濫用: 일정한 기준이나 한도를 넘어서 마구 씀)하여 사람 죽이기를 칼로서 도마 위에 고기를 썰다시피 하고 있었다. 당시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류(士流: 선비 및 벼슬아치들)와 모든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김안로를 지탄(指彈: 잘못을 꼬집어서 비난함)하지 못했다.
백헌 공(公)은 불의(不意: 옳치 못함)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백헌 공(公)은 천하(天下)를 주름잡을 만큼 막강(莫强: 더 할 수 없이 매우 강함)한 권력을 쥐고 휘두르던 김안로(金安老)에 맞서서 그의 죄와 허물을 폭로하여, 간사스런 싹을 꺾는 데 힘을 실었다.
비록 당장 김안로가 처형 되지 않았지만, 그의 기세가 꺾이고, 그를 추종하던 무리들을 숙청(熟淸: 그릇된 일을 저지른 사람을 없애 버림)하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기여(寄與)하였다.
혼탁(混濁)한 조정(朝廷)이 다시 광명을 찾으니, 이것은 의로운 선비의 고귀(高貴)한 피의 대가로 얻어낸 역사적으로 값진 공로(功勞)가 아니겠는가!
(원문) :안로자위도조육시
(安老自爲刀俎肉視)
사류거세췌췌(士流擧世惴惴)
막지감지이(莫之敢指而)
공이위포항언기죄
(公以韋布抗言其罪)
역절간맹(逆折奸萌)
안로미사이(安老未死而)
기골이한(其骨已寒)
예곽청천일복명(翳廓淸天日復明)
차비공일사지공호(此非公一死之功乎)’5)
백헌(栢軒)선생은 짧은 생(生)을 살면서 남긴 시(poetry) 작품은 [애신성부: 哀新城賦]란 부(賦: poetical prose)와 사형(死刑)을 받게 되었을 때, 왕의 준엄한 언어의 공포(恐怖: terror.두려움)와 신체적 박해(迫害:persecution, 괴롭히고 해를 끼침)를 받으면서도 의연(毅然: firm, 절조가 굳고 끝 덕 없다.)한 자세로 생(生: 삶)과 사(死 : 죽음)가 뒤바뀌는 바로 직전(直前)에 남긴 7언절구(七言絶句)의 귀한 한편의 시(poetry)가 전해오고 있다.
우선(于先) 65구(句)로 구성된 긴 부(賦)를 번역된 내용과 원문인 한자(漢字)로된 문장(文章)에 음(音: 소리)과 훈(訓 : 뜻)을 붙여서 차례로 다음 쪽에 소개(紹介)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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