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반정 (조선 문학) [文體反正]
문체를 정통고문(正統古文)으로 되돌리려 한 운동.
조선 후기 박지원을 비롯한 진보적 문인들이 정통적인 문체를 벗어나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를 구사해 글을 쓰자 정조(正祖)를 비롯한 보수파가 이를 바로잡으려 한 것을 말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가 당시 문단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읽히자, 이러한 패사소품체가 확산될 것을 염려한 정조는 명청(明淸) 소설의 수입을 금지하고 박지원에게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글을 지어 바치게 했다.
조선 후기는 봉건사회가 해체되면서 여러 변화를 겪게 된다. 농촌사회가 분화되고 상공업과 도시가 발달했으며 민중들의 의식도 변화했다. 이때 박지원을 비롯한 당시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고금(古今)의 치세(治世)와 난세(亂世)의 원인, 제도개혁, 농공업의 진흥, 화식(貨殖) 등 사회경제적인 개혁방안을 토론했고, 중국여행 체험을 글로 써서 돌려보기도 했다. 홍대용·이덕무·박제가·유득공·이서구·정철조 등이 박지원의 집에 모여 밤을 새워 당시 현실문제를 논의하고 학문적·문학적 교류를 함께 했다. 그들이 특히 흥미를 가졌던 것은 청나라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읽는 것이었다. 그중 〈열하일기〉는 다채로운 표현양식과 독특한 문체를 구사해 당시의 화제작이었다. 박지원의 문체는 독특해 연암체(燕巖體)라고 불렸다. 연암체의 특징은 소설식 문체와 해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정통 고문에 구애되지 않고, 소위 패사소품체라고 불리던 소설식의 표현방법을 과감히 도입해 쓰고 현실의 생동하는 모습을 묘사했으며 시어(詩語)의 사용이나 고답적(高踏的)인 용사(用事)는 쓰지 않았다.
정조는 문체의 흥망성쇠는 정치현실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세도(世道)를 반영한 글을 읽으면 당시 정치의 득실(得失)을 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문학은 도(道)를 실어나르는 도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당시의 문체가 위미(萎靡)하여 근심스럽다고 하면서 문체 문제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정조는 육경(六經)을 진짜 고문(古文)이라고 하면서 그 정신을 이어받아 전아(典雅)한 고문으로 글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정조는 연암 일파의 문체를 못마땅히 여기고 문풍을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문화정책을 펼쳤다.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해 각신(閣臣)에게 당시의 문운(文運)을 진작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도록 했고 주자서(朱子書)를 비롯해 학문과 문학에 본보기가 될 만한 책들을 간행하는 한편 명청의 문집과 잡서(雜書) 그리고 패관소설의 국내 유입을 금했다. 또 문체가 불순한 자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했고 남공철·이상황·김조순 등을 문체 불순으로 문책했으며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도록 했다. 이 문화정책은 당시의 전통적인 순정(純正) 문학의 전통을 계승하고, 치세(治世)의 문학을 꽃피우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를 했지만, 당시의 변화하는 현실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정조의 문체반정책에도 불구하고 패사소품체는 더욱 확산되어, 소설적 문체와 사실주의적 표현기법의 작품이 계속 인기를 끌게 되었다. 문체반정은 당시 사상의 발전과 문인들의 창작활동을 억압하는 보수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시대의 흐름을 되돌리려 한 문화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金泳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