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굴암의 옛모습 ***
성균관대박물관이 1913년 석굴암 해체 수리 당시 무렵 촬영한 유리원판 각종 사진을 공개했다.
이는 석굴암 해체된 직후 모습이다. [연합]
1913년 무렵 경주 석굴암(石窟庵)을 처음으로 해체ㆍ복원하는 과정을 담은 유리원판 사진 12점과
1925년 불국사 다보탑 수리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과
다보탑 위에서 찍은 석가탑(釋迦塔) 사진도 처음으로 공개된다.
1960년대 2차 수리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석굴암의 어제와 오늘을 시간 순서대로 보여주며,
석굴암 내부를 실물 70% 크기 모형으로 제작해 선보인다.
1차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천불보탑(千佛寶塔)과 금강역사(金剛力士) 팔뚝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대여해 전시한다.
다보탑 수리에 관해서는 보고서가 없어 그 이전 모습은 알 수 없었으나
이번 유리원판 사진을 통해 그 실상의 단면들이 드러났다.
특히 석가탑은 1966년 해체복원에 앞선 모습을 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석가탑은 해체 복원을 하면서 떨어져 나간 상륜부(윗부분)를 남원 실상사탑을 모델로 삼아 만들어 올렸다.
이와 함께 이번 전시회에서는 경주 남산(南山)의 식민지시대 유리원판 사진 60점도 공개된다.
이 유리원판 중 1910년대 석굴암 사진은
경주에서 동양헌(東洋軒)이라는 사진관을 운영한 다나카라는 일본인이 찍은 것으로 추정되며,
1925년 다보탑과 남산 사진 등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장을 지낸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가 촬영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에 공개되는 유리원판은 1953년 해외로 반출되려던 것을 성균관대가 구입한2천여 점 중 일부다.
(서울=연합뉴스)
◦ 60년대 석굴암 잘못 복원
◦ 성균관大 박물관, 1913년 보수공사 직전 사진 공개
▫ 1910년대 초반 일제가 보수하기 직전의 석굴암 팔부신 중상 부분
(아래 왼쪽 그림에서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
입구에 있는 팔부신중은 다른 팔부신중과 달리 90도로 꺾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균관대 박물관 제공
▫
1960년대 석굴암 복원이 잘못됐음을 뒷받침하는 사진이 발견됐다.
현재 석굴암 입구 좌우에 있는 팔부신중(八部神衆·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 한 쌍은 다른 팔부신중과 함께 일렬로 서 있지만,
원래는 90도 각도로 꺾어져 세워져 있었다는 것이 석굴암 보수공사(1913~1915) 직전에 촬영한 사진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성균관대 박물관이 17일 공개한 이 사진은 석굴암 본존불을 바라볼 때
오른쪽에 있는 금강역사상과 팔부신중을 촬영했는데, 팔부신중은 현재와는 달리 3개만이 일렬로 서 있다.
나머지 하나는 90도 각도로 꺾여 서 있다.
이 팔부신중의 그림자가 바로 앞의 팔부신중에 비쳐있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
일제는 심한 훼손으로 붕괴가 우려되던 석굴암을 1910년대 해체한 뒤 복원하면서
좌우 입구에 있는 팔부신중 한 쌍을 다른 팔부신중과 90도 각도가 되도록 세워 놓았다.
그러나 문화재관리국이 1961~1964년 석굴암을 다시 복원하면서 이 팔부신중을 다른 팔부신중과 일렬이 되도록 세웠다.
당시 복원 관계자들은 “일제가 석굴암의 원형도 모르고 훼손시켰다”고 주장해 이후 40여 년간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지난 2001년 서지학자 고(故) 이종학씨가
‘조선미술대관’(1910년 간행)에 실렸던 석굴암 본존불 왼쪽 편의 팔부신중 사진을 공개했지만
당시는 사진 상태 때문에 입구에 있는 팔부신중이 90도 각도로 꺾였다고 100% 장담할 수 없었다”며
“이번 사진은 석굴암의 원형을 찾는 결정적 자료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도 “팔부신중 위치가 잘못됐다는 것은 이제 명확해졌다”며
“그러나 지금 당장 석굴암에 손을 댈 수는 없고, 언젠가 보수할 때 고쳐야 할 것”이라고 했다.
▫
이 사진은 1910년대 경주에서 동양헌(東洋軒)이라는 사진관을 운영하던 일본인 다나카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후지타 료사쿠가 소장했다가 1953년 성균관대가 구입해 소장해 왔다
▫
석굴암 팔부신중의 구조는 명확해졌지만, 석굴암은 여전히 많은 논쟁거리를 품고 있다.
석굴암 본존불에 자연 채광할 수 있도록 천장에 창이 있었다는 주장(광창설·光窓說)도 그런 예다.
그러나 광창이 천장에 있으면 하중을 견딜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본존불이 바라보는 방향이 문무왕릉으로도 알려진 대왕암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동짓날 해 뜨는 방향이라는 설도 있다.
▫
석굴암이 무리수인 √2의 비례미에 따라 기하학적으로 건축됐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인 측량기사 요네다 미요지가 1940년에 발표한 논문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따랐다.
1960년대에 석굴암을 정밀 실측한 결과,
석굴암 본존불을 모신 곳은 요네다의 주장처럼 반지름 3m60 정도의 반듯한 원형이 아니라,
곳에 따라 반지름 길이가 1m 이상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하학적 비례미는 애초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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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전실(前室) 구조는 굴절형이었을까, 직선형이었을까.
전실 좌우 벽의 팔부중상(八部衆像·불법을 수호하는 불교 신들의 조각상)은 8구(軀)였을까, 6구였을까.
현재 전실 입구 쪽의 팔부중상 2구와 나머지 6구의 모양과 크기는 왜 다른 것일까.
17일 성균관대 박물관이 1910년대 초 석굴암 전실 사진을 공개한 것을 계기로
석굴암 전실의 원형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지고 있다.
▽팔부중상은 8구인가, 6구인가
=현재 석굴암 전실 좌우엔 팔부중상이 4구씩(총 8구) 세워져 있다.
그러나 성대 박물관이 발표한 사진엔 좌우로 3구씩(총 6구) 보이고 입구 쪽이 꺾인 상태.
이 꺾인 부분에 1구씩 더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10년대 초에는 꺾인 부분에 조각상이 없었다.
일본인 미술사가인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의 ‘조선 경주의 미술’엔 당시 전실의 안쪽에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
이를 보면 꺾인 부분에 조각상은 보이지 않고 돌만 쌓여 있을 뿐이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 무너진 석굴암을 수리하는 도중
주변에서 발굴한 2구의 조각상을 팔부중상의 일부라고 판단해 굴절 부위에 붙였다.
문명대 동국대 교수나 성대 박물관의 김대식 학예실장 등 불교미술 관계자들은
조각상들이 굴절 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굴절 부위에 조각상들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카무라는 책에서 “4번째 조각상 2개는 1913년 보수공사를 할 때 조선총독부가 부가했다…
이는 추악의 극이며 실로 대담함 추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제강점기 한국 미술을 연구했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도
1910년대에 이미
“문제의 두 상은 석굴 인근에서 발굴한 것으로, 무슨 근거로 추가를 감행했는지 궁금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출처 :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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