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재현된 조선조 당쟁
최근 정조의 어찰이 발견되었는데, 주류 사학자들은 그것을 정조 암살설은 허구임을 나타내는 증거로 여기고, 비주류 사학자들은 "암살은 가까운 사람이 저지른다"는 논리로 오히려 정조 암살설의 증거로 삼는다.
기존 주류 사학계의 입장은 "정조는 독살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구한말 위정척사파, 그 이전의 노론, 그 위로 서인에게로 올라갈 수 있는 역사관이다. 반면에, "정조는 독살 당했다"는 비주류 사학계의 관점은 거슬러 올라가면, 주로 당시 남인의 생각이었다. 남인의 기둥이자 변호인이자 대변인인 다산 정약용이 말하기를 "정조가 노론을 싹 쓸어버리고 남인을 중요할 테니 사흘만 기다리라"고 했다고 이덕일이 테레비에서 말한 것으로 내가 기억을 한다. 그런데 사흘 뒤에 정조가 갑자기 죽었고, 시신을 염습할 때 들어갔던 가까운 종친이 시신에서 독살당한 증거를 보았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남인들은 무력 봉기를 시도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류 사학에서는 정권에서 소외된 영남 남인들이 정조 독살설을 음모설로 본다.
그런데 이때 남인이라는 세력이 과연 영남 남인이었을까? 숙종 때 장희빈이 사사되는 사건과 더불어 정권에서 밀려난 남인과 정조 때 정약용과 같이 잠시 등용될 뻔 했던 남인은 같은 정치 세력들이었나? 내가 보기에는 정약용 등의 남인은 경상도 촌구석에 살던 영남 남인들은 아니다. 이들은 주로 경기도 양평, 광주, 남양주 등지에 살던 남인들로 소위 기호 남인이라 한다.
영남이 양반의 고장이라고?
오늘날 종갓집이나 양반 문화를 말하면 영남 지방하고도 안동(安東)이란 동네다. 물론 일부 유서 깊은 양반 종가들이 영남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경기도와 충청도에는 유서 깊은 양반 종가들이 훨씬 더 많다. 다만 워낙 외지다 보니 근대화가 덜 되어 고유의 것이 좀 남아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사람들이 안동과 양반을 연결하는 원인 중 하나가, 안동 김씨다. 조선 말기 60년 세도 정치를 했던 안동 김씨, 거슬러 올라가면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과 남한산성에서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찢었던 김상헌의 후예들임을 알 수 있다. 절개와 의리를 상징하는 집안이다. 이들의 본관은 안동이지만, 이들이 경상도 안동 출신도 아니고 고향도 아니다. 안동 김씨의 3대 거점이 있으니, 안동 풍산의 소산마을과 경기도 남양주의 석실촌이다. 세도정치 시대에는 서울의 장동에 안동 김씨들이 많이 살았으므로 그들을 장동 김씨라고도 별칭했으나, 그들의 근원은 남양주 석실촌으로 수렴한다. 석실촌에 건립된 석실서원은 김상용과 김상헌이 배향된 이래, 1693년 김수항, 1713년 김창협, 1857년 김창흡, 김원행, 김이안, 김창집, 김조순이 뒤이어 배향되었다. 바로 이곳이 서인-노론계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것이다.
청음 김상헌의 증조부는 김번인데, 그의 후손들은 남양주를 근거지로 삼은 것 같고, 김번의 맏형은 김영(金瑛)으로 안동 소산마을에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첫째 김상용(1561- )과 네째 김상헌(1570- ) 형제는 서울 수진방(회현동)에 태어나 자랐다. 모친은 동래정씨였는데, 회현동이 외가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결혼 직후 처가 살이를 하는게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선원 김상용은 외조부 정유길(좌의정)에게 고문(古文)을 배웠고, 나중에 웬만큼 자라자 우계 성혼의 문하로 들어갔다. 성혼은 원래 서울에서 살았으며, 몸이 약해서 벼슬은 그만두고 고향인 파주로 내려가 후학 양성에 힘쓴 인물이다. 백사 이항복, 추탄 오윤겸, 상촌 신홈, 월사 이정구 등과 어울렸다. 김상용은 율곡 이이를 스승의 예로 섬겼다 했는데, 성혼과 이이는 이 두 사람은 경기도 파주의 옆 마을 친구였다. 물론 율곡은 외가인 강릉에서 신사임당과 함께 살다가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와서 성혼과 친구가 된 것이다.
광해군 말년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원주로 거처를 옮겨 잠시 은거하였다. 한때 좌천되어 평안도 정주 목사로 나갔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 남문에서 화약통을 폭파시켜 순절하였다. 이때 별좌인 권순장(1607-1637)과 생원 김익겸(1614-1636)이 함께 순절하였다. 김상용의 서손인 수전(壽全)과 노비인 승선도 함께 순절했다. 세째 아들인 김광현이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다가 변고를 듣고 시신을 찾아보았으나 헛걸음을 하고 김상용이 미리 다른 이에게 맡겨 두었던 옷가지로 허장(虛葬)을 치뤘다. 김상용의 허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선영에 있다. (김광현은 호가 수북(守北)인데, 나중에 강석기의 아들인 강문명을 사위로 맞았다가 소현세자 부부의 죽음과 연루 되어 전라도로 좌천되었다가 홧병으로 죽었다.)
청음 김상헌은 어려서 윤근수에게 배웠다. 1613년 칠서의 옥사 때,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죽을 때, 김상헌의 아들인 광찬(光燦)이 김제남의 아들 협의 사위였으므로 파직당하여, 북인의 박해를 피해 안동 풍산으로 이사, 인조반정후 복귀하여 6조 판서를 역임하고 청서파의 영수가 되었다. 정묘호란 때 예조판서(외무장관)로 주전론을 폈으나 인조가 항복하자 다시 안동으로 은퇴, 청에 6년간 볼모로 잡혔다가, 귀국 후 죽었다.
김상헌의 호는 청음(淸陰)이며, 석실산인(石室山人)이란 호는 중년 이후 경기도 남양주 석실촌으로 물러나 공부에 열중할 때 사용한 호이며, 서간노인(西磵老人)이란 호는 만년에 경상도 안동에 은거하면서 사용한 호이다. 김상헌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5번지에 있다.
구리를 지나 양수리 방면 남양주에 있는 석실촌은 한강변에 고층 아파트가 여러채 들어선 덕소라는 곳 근처다. 사실 가보면 알겠지만, 상당히 "명당자리"다. (인터넷에서 보니깐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란다.) 그러나 땅좀 사러 갔다가 헛걸음이 될 듯, 이미 모 대학이 넓은 면적에 농장을 한답시고 사두고 있으니깐... 대학들이 풍수지리에도 능한 줄은 처음 알았다.
암튼, 김상헌은 43세에 칠서의 옥사가 일어나자 북인의 박해를 피해 안동으로 이사했고, 정묘호란시 주전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안동으로 은거했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 머문 것 뿐으로 생각된다.
김상용의 후손들은 여주에도 살게 되었는데, 김건순이나 김백순과 같은 사람은 천주교 신자가 되어 순교하기도 했다. 결국 남인들만 종교 박해의 희생양이 된 것은 아니었다. 참으로 기가막힌 사실은 천주교 순교자인 김건순은 원래 이 집안의 종손이었는데, 순교하여 파양하고 양자 김면순을 입적하여 종통을 이었다고 한다.
시간도 없고 글쓰기도 힘들어서 더 이상 자세히 이야기하기는 힘들지만, 조선시대 최고 양반들이 살던 곳은 서울 근교라고 보면 되고, 특히 물길로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파주에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이 있고, 남양주에는 김상용과 김상헌의 후예들이 노론의 계통을 잇고 있고, 충청도 예산, 회덕, 논산 등지는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윤증 등의 서인의 종통이 내려온다.
예전에는 '延李光金'이란 말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조 내내 7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은 연안이씨, 광산김씨, 전주이씨인데, 연안이씨 7명 중에는 양관대제학이 2명이 있어서 9명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성동본이라고 당파를 달리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저 양관대제학을 배출한 파는 서인계였고, 일부 남인계가 있었는데, 바로 숙종때 남인이 축출되자 (장희빈의 사사와 관련) 남인계 연안 이씨인 식산 이만부가 처음으로 조령을 넘어 상주로 이주하였다. 그는 유성룡의 증손녀와 결혼하기도 했다. 그때 임금이 이만부에게 "에고, 그 시골 구석에 가서 잘 살 수 있겠냐?"는 식의 말을 한다. 이만부가 퇴계와 유성룡을 존숭했다는 말은 영남 남인들의 정신적 근원을 말해주는 것이다.
정순왕후와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나?
보통 사람들의 편견 중에, 정순왕후 김씨와 심환지는 노론 벽파였고, 노론 벽파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적극적이었던 파벌이었으니깐,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정조가 임금이 되면 불리할 것이니 즉위를 방해했고 즉위 후에도 비협조적이었다가 급기야 암살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정조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 벽파를 모두 죽이지는 않았다. 단지 집권 초기에 자기를 암살하려다 들통난 대역 죄인들만 처단했다. 본보기를 보여 줌으로써 벽파가 더 이상 준동하는 것을 봉쇄한 정조는 시파와 벽파의 갈등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던 것 같다. 또한 말년에는 수원 천도 계획과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확립 등으로 왕권이 강해져서 벽파의 입지는 좁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 중에는, 정순왕후가 김씨였는데 세도 정치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세도 정치를 한 안동 김씨가 아니라 경주 김씨였다. 안동 김씨 세도는 김조순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는 순조의 장인으로서 벽파였다. 죽음을 앞둔 정조가 당연히 아들을 맡길 만한 처지였고, 게다가 김조순의 집안은 순국으로 왕실(나라)을 지켜온 집안인데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나? 1800년 정조가 죽고 벽파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시파 세력 그 중에서도 남인들이 완전히 밀려나고, 시파였던 김조순이 장악하고 있던 병권도 벽파에게 넘어간다. 그러나 4년 후 정순왕후가 죽자, 소위 병인갱화(丙寅更和)로 벽파가 몰락하고 안동김씨와 반남박씨 세력이 주축이 된 시파가 집권하여 본격적인 세도정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휴, 결론을 내리자면, 내가 보기에, "정조 어찰"을 둘러싼 주류학계와 비주류학계의 싸움은 조선의 당쟁이 현대에 재현된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 까닭은 근대화 과정 이후로 남한의 정치와 경제를 압도하게 된 경상도 세력의 음모가 숨어 있다고 나는 본 것이다.
영남이 각광을 받게 된 까닭은 박정희를 필두로 대통령이 줄줄이 영남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일본을 배경으로 한 경제 개발 덕분에 남동임해공업지역에는 광역시가 무려 세 개가 생길 정도이다. 그래서 조선 시대 내내 돌보지도 않았던 시골 동네 경주가 마치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는 반면, 신라의 첨성대와 다보탑과 석가탑을 만들어준 백제의 수도인 부여는 아직도 시로 승격을 못할 정도이다. 김종필이란 거물 정치인을 국회의원으로 열 번 넘게 뽑아 주었건만 변변한 고속도로 하나 놓이지 않았다. 정조 독살설이 음모론이라 하니, 나도 음모론을 하나 더 들자면, 박정희 정권 이후 경상도 세력들이 의도적으로 신라를 높이고 백제를 죽인 것은 아닌가 싶다. 서울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의 왕릉으로 생각되는데, 그 왕릉 아래로 지하차도가 뚫리고 그 바로 곁에 롯데월드가 들어서고 제2롯데월드가 들어설 예정이라고까지 한다. 풍납 토성은 백제의 왕성인 위례성인바, 중국 문화에 오염되기 전의 순수한 전통 문화를 간직하고 있고, 이를 대대적으로 발굴하여 박물관도 세우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이것도 백제 죽이기다.
훨씬 더 심하게 말하자면, 충청도와 경기도의 정통 양반들이 세력을 잃은 까닭은 근대사의 잘못된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조선의 성리학은 은거를 미덕으로 삼았고 대를 이어야 하니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아가 근대화의 헤택을 입을 기회를 빼앗겼을 것이다. 또한 원칙주의자들인 서인 노론 세력은 구한말 위정 척사와 의병 운동으로, 그리고 결국 독립 운동을 많이 하게 되었다. 해방 후 정국이 이상하게 전개 되어 친일파 숙청과 과거 청산이 되지 않고, 결과적으로 독립 투사들에 대한 국가적인 보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집안을 돌보지 못하고 독립운동에 가산을 탕진한 양반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반면, 조선 시대 내내 변방이었던 관서 지방과 영남 지방은 양반 문화가 강하지도 않았고 서양 종교와 신신 교육의 혜택을 입게 됨으로써 근대화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오랑캐론에서 말했듯이, 양반적 사고와 행동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그마만큼 장삿꾼으로서 성공하기에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다. 양반은 항상 체면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치열한 협상에 불리하다.
이렇게 대충 내 생각을 적어 놓고, 우연히 뉴스들을 보니, 진중권이 "정조 어찰로 이인화의 박정희 찬양질의 실체가 드러났다"고 까고 있다. 그게 어디 이인화 뿐이겠는가? 이문열도 마찬가지 아닌가?
에고, 또 한가지 알려줄 것은 이인화는 필명이고, 본명은 류철균인데, '인간의 길'이란 소설에서 주인공 허정훈이 박정희라 한다. 조갑제의 '내 얼굴에 침을 뱉어라'보다 더 박정희를 훨씬 찬양하는 내용이라 한다.
재미삼아, 진중권의 말을 좀 옮겨 보면...
"정조 독살설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것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었다. 영남 남인 세력이 영조를 도와 개혁을 하려 했으나 영조의 독살로 무위에 그쳤으나, 역시 영남 사람들이 박정희를 도와 조국 근대화를 이룩했다는 황당한 스토리였다. 참고로, 이인화 집안은 영남 남인의 후예라고 한다. 이인화가 늘어놓은 헛소리에 대해서는 이미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한 차례 씹어준 적이 있다. 정조는 근대화를 하려던 개혁 군주라기 보다는 여전히 봉건적 질서와 성리학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번 편지의 공개로 거의 낭설로 판명됐다. 문제는 이인화가 왜 팩트를 이렇게 왜곡했느냐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역사를 바라보는 이인화의 이데올로기적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이인화가 쓴 소설의 핵심적 모티브는 아득한 옛날 문중 어르신들께서 자신들의 당리당략을 위해 꾸며내서 자손대대로 들려주신 낭설을 주워들 은것이다. 정조 독살설은 한마디로 당쟁에서 노론을 공격하기 위한 남인의 프로퍼갠더였다. 이인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조를 근대화를 추진한 개혁군주로 둔갑시켜 버린다. 그리고는 과거에 영남 남인이 정조를 도왔던 것처럼, 현대에는 영남 사람들이 박정희를 도와 한국사회가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망국적 현상인 지역주의 몰표 행태는 숭고하기 짝이 없는 조국 근대화질이 된다. 한 마디로 이건 뻔뻔한 경상도 지역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가문 이데올로기에 지역 이데올로기를 섞은 이 선전선동 문학이 50만부나 팔렸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불행이다. 차분하게 철학과 미학이나 공부하고 있었던 내가 졸지에 논객질에 뛰어든 계기가 된 것이 게 그 친구의 박정희 찬양질이었으니,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왜 나를 이 짓 하게 만들었냐고 원망을 해야 하나?" (이상 진중권의 말을 인용)
정조 독살설과 영남 대통령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파 (조선 정치) [時派] (0) | 2010.07.26 |
---|---|
곡운구곡 김수증 (0) | 2010.03.23 |
실증주의 사학자 이병도 (0) | 2010.03.01 |
고대 총학 ‘친일행적’ 10명 발표 (0) | 2010.03.01 |
서울대 일제 친일청산위원회 친일인물 (0) | 2010.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