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이명 (조선 문신·학자) [李頤命]

진가 2010. 8. 16. 13:43
이이명 (조선 문신·학자)  [李頤命]

1658(효종 9)~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이이명 /이이명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
 
숙종·경종대에 노론을 주도하며 주자도통주의(朱子道通主義)에 기반한 정치이념을 적극 실현하고자 했으며, 서양 학술사상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지인(智仁)·양숙(養叔), 호는 소재(疎齋). 할아버지는 영의정 경여(敬輿)이며, 아버지는 대사헌 민적(敏迪)이다. 1680년(숙종 6) 별시문과에 급제, 홍문관정자에 기용된 후 박사·수찬·응교·헌납·이조좌랑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다. 168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승정원의 승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송시열(宋時烈)·김석주(金錫胄) 등 노론 거물의 지원 아래 노론의 기수로 활동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파직, 영해·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호조참의로 복귀했다. 그
후 대사간까지 승진했으나, 기사환국 때 송시열 등과 함께 죽은 형 사명(師命)이 정치적으로 신원되지 못하자, 1698년 이를 문제삼다가 공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유배가 풀렸으나 기용되지 못하다가 1701년에 예조판서로 특임되었으며, 이후 한성부판윤·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706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1708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숙종의 후사(後嗣) 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독대(獨對)라는 형식으로 숙종과 비밀리에 만나, 세자(뒤의 경종)가 아닌 연령군(延齡君)·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 보호를 부탁받고 이들의 후원을 자임했다. 1721년(경종 1) 김창집(金昌集)·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과 함께 노론4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으로 세제(世弟:뒤의 영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실현하려다가 실패했다.
 
 이 일 때문에 소론의 격렬한 공격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고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죽음을 당했다(→ 신임사화). 1740년(영조 16) 노론·소론 간의 치열한 투쟁이 노론의 승리로 결말지어지는 경신처분(庚申處分) 때 복관되었다.
그는 주자도통주의적 이념에 철저하면서도 변화하는 현실에는 유연히 대처했다. 몇 번의 북행사절(北行使節)을 통해 접한 서양의 발달된 문물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천주교·역산(曆算)·천문·지리에 관한 저술을 국내에 소개했으며, 이러한 학풍에 영향을 받아 지리·전산(田算)에도 관심을 가져 지도 및 강역사(疆域史), 전산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북학파(北學派) 실학자들과 달리, 청나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정통적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하여 이들 새로운 사조들을 접했던 까닭으로, 이의 수용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그 실용성은 인정했다.
한편 국내의 현실 문제는 수취체제, 특히 군역의 문제가 근본적인 것이라 보고 이의 개선 방안으로 정포론(丁布論)을 제시했다.
종래의 양인(良人)을 대상으로 역을 부과하던 방식을 벗어나 양반 자제로부터 상민에 이르기까지 15~60세의 장정이면 누구나 일정액의 포(布)나 전(錢)을 부담한다는 안이었다.
 토지공유제론(土地公有制論)에 의한 농민·농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일각에서 모색되던 당시 상황에서의 이러한 개선 방안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으나, 이 시기 노론의 정치적 지향을 잘 보여준다.
저서로는
〈소재집〉·
〈동국강역도설 東國疆域圖說〉·
〈전산촬요 田算撮要〉·
〈강도삼충전 江都三忠傳〉 등이 있다.
 
 과천 사충서원(四忠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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