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죽음으로 조선의 자주개혁은 끝났다
19세기를 보는 ‘또 하나의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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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이 항상 말하기를 척재(이서구·초상화)의 행정 실무 능력(이재·吏才)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에 비하여도 오히려 더 낫다고 하였다. (…) 호조의 늙은 서리들도 또한 말하기를 우리들이 재상(宰相) 거공(鉅公)으로서 호조판서가 되신 분들을 많이 겪어 보았지만 문서와 장부를 환히 꿰뚫어서 마치 신경쓰지 않는 듯하면서도 손바닥을 가리키 듯이 분명히 알고 계신 분은 오직 영평의 이정승(이서구) 한 사람뿐이었다고들 하였다.”
연암 박지원이 가장 기대를 걸었던 제자 이서구(李書九·1754~1825)는 사후 안동김씨 세도정권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삭탈관직된 인물. 하지만 호조판서로서 발휘한 뛰어난 실무능력과 평안감사·호남감사 등 지방관으로서 보여줬던 놀라운 치적 때문에 19세기 호남 백성들의 뇌리에 ‘이인(異人)’ 또는 ‘초인적인 인물’로 각인돼 민중설화 속에 등장하고 있다.
이서구는 1806년 김조순으로 대표되는 시파(時派)에 의해 벽파가 일망타진된 병인경화(丙寅更化) 직후 벽파의 영수 심환지와 ‘몸은 다르지만 속 마음은 같다(이신동장·異身同腸)’는 비난을 받으며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심환지는 지난달 정조가 그에게 보낸 비밀편지 299통이 공개돼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한신대 인문대 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정조의 개혁과 그것이 19세기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 책에서 비운(悲運)의 정치가 이서구의 복권을 시도한다. 사도세자와 정조, 시파, 남인을 ‘선(善)’으로, 벽파를 ‘악(惡)’으로 규정하고 단죄하는 역사관의 극복을 주장하는 저자는 이서구가 외척의 전횡을 반대하고 사림정치의 복원을 주장하는 사림청론(士林淸論) 또는 우현좌척론(右賢左戚論)을 일관되게 고집했기 때문에 외려 안동김씨와 반남박씨가 연합한 외척 세도정권의 탄압을 받아 보수적 사상의 벽파 정치인으로 매도당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정조를 지지한 정치세력이 ‘우현좌척론’을 명분으로 내건 사림청론 세력이었으며 정조 8년(1784) 이후 이들이 시파와 벽파로 분열·갈등하게 됐다는 저자의 주장은 이들의 대립을 흑백 선악으로 극단화하고 그 시원을 사도세자가 죽는 영조시대까지 소급시키는 것이 잘못됐음을 보여준다.
지난달 정조가 그의 최대 정적으로 알려졌던 심환지에 게 보낸 어찰이 공개됐을 때 받은 충격처럼 정조시대 전문가인 저자가 책에서 밝히는 사실들도 소설이나 대중역사서에 익숙한 일반인들이 볼 때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등 관찬사료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개인과 민간의 사료까지 광범위하게 동원해 교차검증하는 방법론을 구사한 저자의 책이 보다 역사적 진실에 근접해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지난 2001년 펴낸 ‘정조대왕의 꿈’에서 정조 독살설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고 이같은 주장이 대중의 역사인식에 미치는 해독을 경고한 바 있는 저자는 우선 19세기 세도 정치기의 역사가 정조시대와의 단절이라기보다 대체로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정조의 죽음으로 조선의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고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의 암흑시대로 접어들게 됐다는 일반의 인식이 잘못됐음을 지적한다. 1800년 정조의 서거 이후 벽파가 5년간 정국을 주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1806년 병인경화 이후 집권한 세력은 바로 정조가 키워낸 노론·소론의 시파 관료학자들이었고, 이후 고종 때 여흥민씨 세도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세도정치를 이끌었던 세력도 그 후예들이었다는 것.
여기에 박지원 등을 계승한 연암일파 지식인과 추사 김정희로 대표되는 추사일문이 대안세력으로 등장해 새로운 시대를 향해 각기 고투하고 있었다. 저자는 19세기 조선이 쇄국으로 일관하다 망했다는 ‘쇄국주의론’은 ‘일제 강점 불가피론’을 정당화하는 논리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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