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후손의 욕망 담긴 ‘족보’

진가 2008. 9. 12. 08:14

최근 중국에서 족보찾기 바람이 불고 있다고 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던 족보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개인보다는 국가를 우선시하는 사회주의적 체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의 하나인 것 같다. 그만큼 가족이나 친족에 대한 강한 유대감은 동아시아 사회에 뿌리박고 있는 전통적 관념일 것이다.

왕실의 계통이나 귀족 가문의 내력을 기록·보존하는 일은 이미 고려 때부터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체계적인 형태의 족보가 나타난 것은 조선이 들어선 15세기부터이다. 성리학이 통치이념으로 자리를 잡음에 따라, 상층 가문에서는 혈연적 관계를 명확히 하고, 명예나 업적을 지켜나가기 위해 족보를 만들었다.

16세기에는 핏줄을 나눈 사람들을 모두 기록한 족보가 나왔다. 조선 후기가 되자 족보 편찬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신분제가 크게 흔들리면서 양반 가문들은 앞다투어 족보를 펴냈다. 이전부터 세력을 가지고 있던 가문은 명문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족보를 다시 정리하였으며, 새롭게 성장한 세력은 이전의 자기 조상이 별볼일없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족보를 새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부작용도 생겨났다. 조선 전기까지 비교적 정확하였던 족보의 기록이 거짓으로 꾸며지기도 하였다. 자기 가문이 명문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선조의 벼슬을 높이기도 하고, 하지 않았던 벼슬을 한 것처럼 기록하는 경우가 그러한 사례였다. 중국을 큰 나라로 받드는 마음에서 확실한 근거도 없이 중국 인물을 조상으로 올리기도 하였다. 족보는 양반임을 말해주는 증거로, 족보가 있으면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커다란 부담이었던 병역의 의무를 면제받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족보를 사고파는 일도 흔했다.

족보의 기본적인 편찬 목적은 자기 가문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정리하여 단결을 다지고, 위계질서를 분명히 하는 데 있었다. 우리처럼 족보의 양이 방대하고 자세하게 잘 정리되어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족보는 한 가문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생활사 자료인 동시에, 가문의 명예를 지킨다는 자부심 아래 사회의 도덕적 규범을 유지시켜 준 자산으로 일컬어진다.

그렇지만 족보는 자기 가문을 다른 가문과 구분하고, 사회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족보는 기본적으로 남성 위주로 가문의 계통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이제 호주제 폐지 논란이 벌어진 지도 상당히 오래되었다. 최근에는 서울에 있는 한 대학교에서 여학생회가 부모 양성쓰기 운동을 벌이는 것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회적 논의가 호적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도 주목할 만하다.

김한종/한국교원대 교수

출처 : 국사샘여깄다!
글쓴이 : 들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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