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 때 기사사화(己巳士禍)로 죽은 양곡(陽谷) 오두인(吳斗寅)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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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원은 숙종 21년(1695)에 지어진 후 숙종 23년에 임금이 ‘덕봉’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 때에도 헐리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마을입구 언덕에 남동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아래쪽 낮은 곳에 공부하는 장소가 있고 위쪽 높은 곳에는 제사지내는 사당이 배치되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정의당과 생활공간인 동재와 서재,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그리고 외삼문·내삼문·홍살문 등이 있다. 소장 전적과 유물로는 오두인이 지은 『양곡집』과 숙종 7년(1681) 김창협이 그린 오두인의 초상화 1점 등이 있다.
덕봉서원은 큰 규모는 아니지만 건물도 훌륭하고 공간도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의 문신(文臣)인 충정공(忠貞公) 오두인(吳斗寅) 선생(先生)의 덕망(德望)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숙종 21년(1695) 창건하였고 이 해에 사액
(賜額)되었다. 양곡(陽谷) 오두인(1624∼1689) 선생은 인조(仁祖) 26년(1648) 진사시(進士試)와 문과(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후 공조참판(工曹參判), 호조참판(戶曹參判), 경기도(京畿道) 관찰사(觀察使) 등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숙종 15년(1689)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재직(在職) 중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西人)들이 실각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 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않아 삭직(削職)되었다.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廢位)되자 이를 반대하다 국문(鞫問)을 받고 의주(義州)로 유배(流配) 도중 파주(波州)에서 죽었으며 이 해에 복관(復官)되었다. 숙종 20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경내(境內)에는 사우(祠宇), 내삼문(內三門), 정의당(正義堂), 정문(旌門)이 남아 있고, 동·서재(東·西齋)는 1940년 훼철(毁撤)되었다.
[출처] 시도유형문화재 제8호(경기) 덕봉서원(德峰書院)|작성자 nocleaf
본관 여흥(驪興). 성 민(閔). 존호(尊號)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徽號) 의열정목(懿烈貞穆). 유중(維重)의 딸이다. 1681년(숙종 7) 계비가 되었다. 숙종은 후궁 장씨(張氏)의 미색(美色)에 혹하여 왕후를 멀리하였으며, 장씨가 왕자 윤(昀:경종)을 낳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이 문제로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西人)이 밀려나고, 이후 인현왕후는 폐위(廢位)되어, 궁중에서 쫓겨나 서인(庶人)이 되었다가 1694년의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왕후로 복위하였다. 소생이 없었으며 능은 고양(高陽)의 명릉이다. 예의바르고 정숙했다고 하며,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궁녀가 쓴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이 전해진다.
기사환국
숙종의 계비(繼妃) 민씨(閔氏)가 왕비로 책립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후사를 낳지 못하자, 숙종은 후궁인 숙원 장씨(淑媛張氏)를 총애하게 되었다. 그러자 장씨의 오라비 장희재(張希載)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폐단이 생겼는데, 조정에서는 이 일을 중요시하여 궁중의 내사(內事)까지 논간(論諫)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차에 장씨가 왕자 윤(昀)을 낳았다. 숙종은 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때 당시의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정비(正妃) 민씨가 아직 나이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嫡子)로써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 하여 원자책봉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숙종은 숙종대로 서인의 전횡을 누르기 위하여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 원자의 명호를 자기 뜻대로 정하고 숙원을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이때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은 상소를 올려 숙종의 처사를 잘못이라고 간하였다. 숙종은 원자정호와 희빈 책봉이 이미 끝났는데, 한 나라의 원로 정치인이 상소질을 하여 정국(政局)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분개하던 차에 남인 이현기(李玄紀) 등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이를 기화로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약(賜藥)을 내렸다. 송시열의 사사(賜死)로 된서리를 맞은 서인은 이어서 김수흥(金壽興) ·김수항(金壽恒) 등의 거물 정치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파직되고, 또는 유배되어 서인은 조정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권대운(權大運) ·김덕원(金德遠) ·목래선(睦來善) ·여성제(呂聖齊) 등의 남인이 득세하였다. 이 환국(換局)의 여파로 민비는 폐출(廢黜)되고, 장희빈은 정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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