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양진씨

의관 진효일

진가 2009. 5. 10. 10:49

議官 陳成一   (一名: 孝一)

生 : 1861 (辛酉)

卒 : 1915 (己卯)


官 職:  通訓大夫 面長 中樞院 議官

配:     淑人 順興安氏.

墓 所:  용인군 남사면 艮坐.

石 物:  通訓大夫 議官 孝一 配 淑人 順興安氏 之墓

       中樞院議官 性本溫良恭儉一鄕稱之立碑 (惠民不忘碑)


[惠民不忘碑]

面長 陳議官 孝一 惠民不忘碑(면장 진의관 효일 혜민불망비)


永蠲虛結 宿獘如洗(영견허결 숙폐여세)

一片穹石 百年頌惠(일편궁석 백년송혜)


              隆熙 三年 七月(1909年 7月)

 

내용: 

[면장 진 의관 효일께서 고을 백성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워 그 뜻을 오래도록 기리려한다.

 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공연히 무는 조세를 없애 줌으로써, 오래 묵은 폐단을 깨끗이 씻어 주어 한 조각의 큰돌에 새겨 그 은혜를 오래도록 기리려한다]

                                           [흉희 3년 7월 <1909년 7월>]


永蠲虛結: 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공연히 무는 조세를 없애 줌으로써

宿獘如洗: 오래 묵은 폐단을 깨끗이 씻어 주어

一片穹石: 한 조각의 큰돌에 새겨

百年頌惠: 그 은혜를 오래도록 기리려한다.

[ 虛結: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공연히 무는 조세. 宿弊:오래 묵은 폐단 ]


所在地: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원암리 원암동 마을 입구.

         (소재지는 원래 세워진 곳에서 도로확장 공사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전되었다가  매호공과 창양부원군 신도비 옆에 1980년대에 옮겨옴)


  面長 議官 陳成一 (孝一)은 高麗 仁宗(1122-1146) 이자겸의 亂때 척준경과 함께 이자겸 一派들을 除去하는데 공을 세워 驪陽君에 封하여진 驪陽陳氏의 始祖인 陳寵厚의 25世孫이며, 또한 高麗 毅宗-明宗 朝 知樞密院事 左軍兵馬使(1172) 金紫光祿大夫 參知政事(1174) 判兵部事(1176) 陳俊의 24世孫으로, 陳俊은 高麗 毅宗 24年 庚寅(1170)에 있었던 경계지란(庚癸之亂)으로 武臣들이 文臣과 그 家族을 무차별 殺害할 때 “우리가 미워하는 자는 이복기 한뢰 등 4,5인에 불과한데 죄 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학살하는 것은 나라를 크게 위태롭게 하는 亡國의 처사라고 극력 反對하였으나 이의방 등이 듣지 않고 家族과 家屋까지도 남기지 않는 잔인한 行動을 감행하였다.

 이에 한쪽 팔을 걷고 모자를 벗어 가만히 武人을 표시하게 하여 화를 면하게 하여, 이로 無罪한 文官과 家族들을 구원하니 그 때 사람들이 그의 德을 높이 稱頌하여 ‘有陰德 後必昌’ 이란 말이 나왔다한다.

  또한 武臣의 亂 以後의 피폐한 農村을 事實的으로 묘사한 <도원가 挑源歌>가로 특히 유명하며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지은 <사금통주구일 使金通州九日> <봉사입금 奉使入金> 등 翰林別曲 제1장에서 (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이라고 하였듯이 走筆로 이름난 詩人인 梅湖 陳澕의 22世孫이다.

 梅湖 陳澕는 1198년 司馬試에 首席으로 合格하고 1200年에 文科에 及第하였다.

  다음 해에 內侍에 보직되고, 1209년 (熙宗5) 學正으로 전직하였으며 1212년(康宗1)에 制科試驗에 참여하여 詔書를 짓는 일을 맡아보았다.

 1213년에는 舌禍로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翰林院에 들어갔다.

 1215年 (高宗2)에 館閣諸公에게 賦詩 40여운을 시험하였는데 이규보가 수석을 차지하고 梅湖 陳澕가 次席을 하였다. 書狀官으로 금나라에 다녀온 뒤에 玉堂으로 옮겨 知制誥를 겸직하였고, 正言에서 補闕을 거쳐 右司諫이 되어 知公州事에 보직되었다가 재직 중 死亡하였다.

  高麗 29代 忠穆王(1344-1348). 30代 忠定王(1349-1351). 31代 恭愍王(1351 -1374)의 3代 王을 모신 臣下로 忠定王 元年(1349年) 寶文閣 大提學을 지냈으며, 같은 해 10月 都僉議參理를 지내고 그 다음 해(1350年)에 端城翊祚功臣이 되어 昌陽府院君이 되신 雲谷 陳斯文의 19世孫이다.

 雲谷은 이 時期에 처음 들여온 性理學을 깊이 공부하였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學文을 몸소 실천하였으며 佛敎를 유독 배척하였다.

  또한 朝鮮 成宗 6年 1475(朝鮮 成宗 6年 3月). 乙未謁聖親試丙科에 급제하여 平昌郡守 藝文館 兼 春秋館編修官 應敎(1470-1494)를 지낸允平(1430)

의15世孫이다.

  朝鮮 11代 中宗을 도와 燕山君의 廢倫政治에 反旗를 들고 中宗反正에 참여한 陳适의 14世孫이다.

  以後 陳适은 靖國功臣 冊錄을 받고 郡守(1506-1544)를 지냈다.

  또한 그의 12代祖 陳又新은 資憲大夫 工曹判書의 추증 받으셨으며, 11대조 陳綱은 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10代祖 陳景立은 中樞府僉知事였으며, 그의 9代祖 陳澤은 武科 宣傳官 行 水城僉使를 지냈셨다.

 그의 8代祖 陳成龍은 通德郞이었으며, 그의 曾祖父인 陳核은 (1772-1825)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에서 先代祖 (16세 澤- 21世 순현까지)가 약 150餘 年間 살던 곳을 떠나 용인시 남사면으로 移居하였다.

 

  이때가 朝鮮朝 (23代 純祖) 後期인 1800年代 初期로 朝鮮이 激動의 波高가 몰아치기 直前이다.

 그의 祖父는 陳東昇이며(1794. 卒: ?), 그의 父는 陳煜 (1820-1880) 이다.

 

그는 (1861- 1915) 舊韓末 中樞院 議官을 지내며 고을의 살기 어려운 백성들에게 많은 온정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구성면장을 보면서 가난에 시달리는 住民들의 稅金을 (虛結)해결해주는 등 고을 백성들에게 많은 溫政를 베풀었다.

  이에 고을 住民들이 그의 뜻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마을 입구에 [惠民不忘碑]를 세웠다.

 

不忘碑는 현재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원암리 원암동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그의 관직은 驪陽陳氏 大同譜에 보면 中樞院 議官으로 되어있고 不忘碑에는 면장 의관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墓所에는 <通訓大夫 議官>으로 적혀있다. 그래서 子孫으로써 그의 官職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는 매우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기록하는바 後에 이 記錄이 잘못 된 部分이 있으면 정정해 줄 것을 기대한다.

 

[通訓大夫 面長 中樞院 議官 陳孝一] 이라고 삼가 記錄한다.

 그의 墓所는 앞에 기록한대로 용인시 남사면 원암리 원암골 艮坐에 있으며 墓碑에는 [通訓大夫 議官 孝一 配 淑人 順興安氏 之墓]라고 기록됐다.

  이는 그의 子 平範(1879 -1931. 一名: 平鎬)께서 辛酉年 3月 (1921년 3월)에 墓所를 丹粧하고 세웠다.

'여양진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응교공 진윤평  (0) 2009.05.10
운곡 진사문  (0) 2009.05.10
경주 향안  (0) 2009.05.10
진숙량  (0) 2009.05.10
족보상식  (0) 2009.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