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陳 斯 文
號: 운곡(雲谷)
生: ?
卒:1363
官職: 金紫光祿大夫 政堂文學 寶文閣 大提學,都僉議 參理(1349). 端城翊祚功臣이됨.
封 昌陽府院君
묘소: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艮坐
묘: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坤坐.
雲谷 斯文은 고려 인종(1122-1146)이자겸의 난때에 척준경과 함께 이자겸 일파들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여양군에 봉하여진 여양진씨의 시조가된 진총후의 6세손이며, 고려의종24년 경인(1170) 정중부 이의방 등의 경계지란(庚癸之亂)으로 문신들과 그 가족들을 무차별 살해하므로 公(陳俊)이 말하기를“우리가 미워하는 자는 이복기 한뢰등 4,5인에 불과한데 많은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고 가산을 몰수함은 부당한 일이다” 하며 만류하였으나 이의방 등 하급 무장들은 듣지 않았다.
그때 문신들이 공의 德으로 많은 죽음을 면하게 한 高麗 毅宗-明宗朝 金紫光祿大夫 參知政事, 判兵部事 陳俊(문헌:동국여지승람19, 동국통감 권27, 고려사 명종실록, 교려사 권100)의 5世孫이며, 한림별곡 제1장에서 (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하였듯 주필로 이름난 詩人으로 고려 신종에서 희종 연간의 文臣인 梅湖 陳澕의 曾孫으로, 高麗 29대 충목왕(1344-1348). 30대 충정왕(1349-1351). 31대 공민왕(1351-1374)의 3대 왕을 모신 신하로 충정왕 원년(1349년)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을 지냈고 같은 해 10월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를 지내고 그 다음 해(1350년)에 단성익조공신(端城翊祚功臣)이 되어 창양부원군(昌陽府院君)의 작을 받으셨다. 그는 이 시기에 처음 들여온(백이정) 성리학을 깊이 공부하였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학문을 몸소 실천하였으며 불교를 유독 배척하였다.
이 시기에 왕의 나이가 어려 왕의 외척(外戚)득세하고 있었다.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해 덕영공주가 모든 정사를 도맡아 하게 되면서 도장을 두고 치성을 올리는 등 재앙을 없앤다고 운수를 점친다는 명목으로 곳곳에 불교사찰을 짓고 도량을 세운다고 백성들을 동원하여 노역을 일삼으며 국고가 탕진하였다.
또한 고려 조정은 간신배 무리들이 극도로 국정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이에 公은 民家를 돌아보고 地方의 與論을 수집하여 바쁜 농사철에 백성을 동원하여 사찰을 짓는 것을 중단할 것을 狀啓(장계)(왕의 명을 받아 지방에서 民情을 살핀 결과를 글로 왕에게 올림)를 올리게 된다.
그러나 조정에서 올바른 여론이 형성되지 못하고 권문세가의 농간이 날로 심해져 사리사욕을 탐하는 간신배 무리들이 임금 주위에 항상 들 끌어 임금은 이 장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공은 개탄한 나머지 병이 되어, 공은 관직을 사임하고 구성현 도촌장(지금의 용인시 남사면 원암리)남쪽의 천덕산 골짝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던 중 밖으로부터의 소식을 들으니 김용의 난이 일어나 공민왕이 흥왕사에서 참변(1363년 윤 3월 초하룻날)을 당할 뻔 하였다는 소식에 “이제 고려의 기운이 다하는구나”하며 천덕산 꼭대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식음을 전패하기 십여 일만에 세상을 뜨셨다.
이에 마을 사람 들이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이후 이 마을 이름을 원암(寃암 :원통하고 슬프다는 뜻으로)이라고 부르게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다만 그에 대한 자료가 전해지지 않아 빛을 발하지 못함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며, 아직 알려지지 않은 용인지역의 고려시대의 인물이 말없이 묘소만 후손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을 뿐이다.
- 참고 -
흥왕사 참변(김용의 난):1363년 윤 3월 초하룻날. 권력을 위해서는 살인도 서슴지 않던 김용은 급기야 절대 권력을 누리기 위해 공민왕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1363년 윤3월 1일 밤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복면을 하고 흥왕사에 행궁을 차린 공민왕의 처소를 급습하게 된다. 이때 호위 인원이 모두 달아나고 첨의평리 왕자문, 판전교사 김한룡을 비롯하여 십여 명이 죽임을 당하지만 공민왕은 내시 이강달의 도움으로 간신히 태후의 밀실에 숨어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러나 반란군이 완전히 진압된 후에도 김용은 1등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흥왕사에 침침했던 잔당 90여 명이 체포되면서 김용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 그가 체포된 잔당들에 대한 심문을 맡았는데 잔당들 심문하지 않자 의심을 받게 되어 결국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임견미에게 국문을 받고 사형 틀에서 사지가 찢겨지는 죽음을 당해 그의 머리는 개경으로 보내져 저자에 효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