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임신서기석

진가 2010. 8. 17. 09:56
신라청년(新羅靑年)의 지행합일(知行合一) 주의 -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서예전각자료실
초정(椒井) 조회 55 | 2009.04.18. 01:42 http://cafe.daum.net/knoudong/8UML/152
신라청년(新羅靑年)의 지행합일(知行合一) 주의  두계 이병도의 업적

주:  신라 시대의 청년들의 정신을 이해하면 신라의 삼국통일의 정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의 원동력"에 대한 두계 이병도 교수의 논문 중 신라 시대의 청년의 정신에 대한 부분을 여기에 소개합니다.  이 글의 앞 부분은 본인 블로그의 "신라통일의 원동력" 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병도  교수의 논문 "신라 통일의 원동력"은 - 이병도, “성기집(成己集)”, p 124, 정화출판문화사, 서울, 1983.")에서 이 주제를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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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청년(新羅靑年)의 지행합일(知行合一) 주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하면, 명(明)의 왕양명 (수인)의 주장하는 그것을 연상하기 쉬우나, 그러나 왕씨의 이른바 지행합일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철학에 근거를 둔 것임으로 여기서 내가 말하는 바의 지행합일이 그것과는 개념을 달리하고 있다. 여기서 이른바 지행합일은 극히 상식적인 용어(用語)로서 실상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의미로 보아야 하겠다. 신라의 지식 청년 사이에는 확실히 한가지 좋은 지식을 얻으면 반드시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는 주의가 유행하였다. 바꿔말하면 지식(知識)은 실천(實踐)을 짝하고, 실천을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여기에 가장 실증적(實證的)인 일례를 들면, 경주박물관(慶州博物館)에 소장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으로서 그 내용을 소개하면서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부치려고 한다. 

 

(가)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은 1940년 당시의  경주군 견곡면(見谷面) 금장리(金丈里)

       석장사지((石丈寺址) 뒤 언덕에서 발견되어 그 후 경주박물관에 수장(收藏)되어 온 것인

       데,  필자도 전후 수차에 걸쳐 실물을 관람 하였다. 서기(誓記)의 원석(原石)은 상광하협의

      평편한 천석(川石)으로 길이 31 cm, 상부의 폭은   12 cm 여, 이하는 차차 좁고 두께는 약 2 cm

      남짓하다. 각문(刻文)은 송곳같은 뽀족한 쇠끝으로 고졸(古拙)하게 음각한 것인데, 도합 74자에 

      불과한 것이다. 원 행수에 의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1.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경주박물관 소장)

 

 

         1. 壬申年 六月 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 (18자)

            (임신년 유월 십육일 이인병서기 천전서 금자)

         2. 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旡誓 若此事失 (16자)

           (삼년이후 충도집지 과실기서 약차사실)

         3. 天大罪淂誓 若國不安 大亂世 可容 (14자)

           (천대죄득서 약국불안 대난세 가용)  

         4. 行 誓之 又別先辛未年 七月 二十二日 大誓 (16자)

           (행 서지 우별선신미년 칠월 이십이일 대서)

         5. 詩尙書禮(?)傳倫淂誓 三年 (10자)

           (시상서예전륜득서 삼년)

 

위의 서기를 우리말로 해독하면 다음과 같다.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서약하여 가록한다. 하나님 앞에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까지 충성스러운 도리를 간직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 맹세를 어기면, 하나님에게 큰 죄를 받을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우면 가히 모름지기 충성스러운 도리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 시(詩), 상서, 예전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써 한다. 


위의 서약은 둘로 되어있다. 하나는 신미년의 서약, 하나는 이듬해인 임신년의 서약이다. 즉, 신미년의 서약은 유교, 경전(經傳 - 시, 상서, 예전)의 습득, 임신년의 서약은 장래 실천할 것을 굳게 맹세한 것이다. 좀 더 말하면, 전년 (신미년)에는 경전의 학습 기간을 삼년으로 서약하였으나 실제 그 진도가 뜻대로 되지 아니한 듯하여 약속한 3년에다가 1년을 더 가할 목적으로, 다음의 임신년 6월 16일 (만 일년에 가까울 때)에 이르러 금자 3년 이후 충도집지 운운이라고 하였던 모양이다.

 

<이 글의 문체 분석- 블로그 주> 우리는 위의 문장이 순수한 중국식의 한문이라기 보다는 우리말 어순으로 내려부치는 글임을 알 수 있다. 그 중에는 약간의 분명치 못한 글자도 있다 제3행 말미의 “”자는 글자 모양으로 보든지 문맥으로보아 “容”자임에 틀림없는 것 같으나, 제5행 중 “? (주: 블로거가 입력하기 어려운 글자임)”자가 불확실하다. 이것은 “禮”자의 약자 같기도 하고 또 “秋”자 비슷하기도 하다. 그러나 “秋”자라고 하면 아래글자-傳자와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 일전에 나는 예기(禮記)와 춘추전(春秋傳)의 합칭으로 해석한 일이 있었는데, 요새 와서는 잘못됨을 깨달았다. 즉, “예전”이 예기의 별칭임을 알았다. (중문대사전예전조 참조). 그러므로 시, 상서, 예전의 3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문체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말식으로 되어있으나, 이두(吏讀), 향찰(鄕札)과는 다르다. 언 듯 보면, 한문에 미숙한 글투같기도 하나, 시서(詩書) 등 경전을 읽을 기초가 있는 사람이 그렇게 서투른 한문을 지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필연코 이두(吏讀), 향찰(鄕札)의 이전(以前)과 초기(初期)에 있어 그러한 식의 문체도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신라(新羅)의 이두(吏讀)는 고구려(高句麗)의 영향으로 진흥왕때의 금석문[金石文) - 단양 적성비(赤城碑)]중에 이미 약간의 이두가 나타나고 있다.

주: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임신(壬申)년에 서약을 기록한 돌"

                                             이라는 뜻으로 이 돌을 발견한 이후

                                             이름을 붙인 것이다 (블로그 주).

      상광하협 - 윗쪽은 넓고 아래쪽은 좁은 형태.

      고졸(古拙) - 예스럽고 솜씨가 서투름, 기교가 없고 서툴러보이나

                          고아한 멋이 있음.

      시(詩) - 시경